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내가 상대를 마음 깊이 담아두고 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사랑을 시작한 연인 혹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체가 없는 감정을 형체가 있는 그 무언가로 전달하는 일은 꼭 해야만 하는 방학 숙제 중 일기 쓰기와 같다. ‘날씨가 좋았다. 즐거웠다.’와 같은 뻔한 문장들이 일기의 주축을 이루듯 ‘사랑해’라는 조금은 상투적일 수 있는 말이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중심을 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투적인 문장과 말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색이 다르게 녹아있다.
각자가 가진 색을 바탕으로 전달되는 마음은 때론 상대에게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연인들은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 항상 궁금해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휘둘린다.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었지만, 때론 그 마음은 지나치게 늦게 도착해 받은 이에게 후회를 남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사랑한다는 확신의 단어가 연착하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다. 영화 속 두 남녀는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끝없이 전한다.
영화 속 해준은 서래에게 따뜻한 음식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당신을 아끼고 있음을 표현한다. 반대로 서래는 해준의 두려워하는 것들을 지워주기 위해 사진을 태워주고, 피 냄새를 지워낸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동으로 마음을 전하고, 그 결과 두 사람은 숨을 같이 쉬고, 잠들어 있는 무방비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믿음과 편안함을 표현한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방식을 보며 일상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다시 떠올려본다. 사랑의 단어가 빼곡히 적힌 편지나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닌 무심한 듯 내 일상에 스며드는 행동들에서 나는 사랑을 느꼈다. 불면증이 일상인 내게 평안히 잘 잤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나 별 이유 없이 생각나서 샀다며 전해주는 선물 같은 것들에 나는 사랑을 느꼈고 그 따뜻함에 많이 울곤 했다.
하지만 은은한 따뜻함만으로는 확신을 갖지 못하기도 한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과 상대가 보내온 온기만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를 오해하고 엇갈린다. 이 두 사람이 마음을 확신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확신을 주지 못한 관계는 어떠한 방향으로도 끝을 내지 못하고 결국 애매하게 흐려져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내가 관계에서 집착했던 것도 확신의 말들이었다. 사랑, 믿음과 같이 실체가 없는 불확실한 말들을 단어로 묶어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피곤해하는 상대에게도 나는 이따금 소위 ‘답정너’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답은 정해져 있음을 미리 말하고 듣는 말이어도 확신의 단어들은 언제나 나와 상대의 관계가 어디로 닿을지 모르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이 아닌 단단한 뭍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으니까.
그렇기에 나를 가장 많이 무너뜨린 것들도 확신의 말들이었다. 상대의 마음이 확실하게 나와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이 단어로 드러나는 순간 하염없이 무너졌다. 단어로 드러난 마음은 판사의 판결문처럼 내겐 하나의 선고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신의 단어는 나를 확실히 세우기도 무너뜨리기도 했다.
확신의 단어는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라도 결말을 가져온다. 관계의 결말은 기회비용과 함께 선택을 요구하며 다가온다. 그리고 결말을 맞이한 우리는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방향은 어땠을지 궁금해하곤 한다. 그렇게 하나의 관계는 한 사람의 기억 속 서랍에 담긴다.
하지만 모호한 단어로 끝을 맺지 못한 관계는 다르다. 꾸준히 들여다보며 나에게 상대는 어떠한지 반대로 상대에게 나는 어떤지 궁금해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 반복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상대가 모호하게 건넨 단어에 담긴 마음은 끝나지 않은 사건의 자료들처럼 한 사람의 기억 속 벽을 차지하고 계절마다, 해마다 들여다보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모순적이게도 모호함이 상대에게 확실히 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상대에게 평생 남아있을 수 있다면, 미결 사건으로 남아 당신의 머릿속 한구석에 있을 수 있다면 모호함을 자처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제서야 평생 기억되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결의 길을 선택한 서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