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아빠는 어디 계시노?
1.
추석이다.
거의 매년 이맘때면 엄마를 모시고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다니곤 했다. 작년에는 “청와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을 들어드렸었다. 청와대 경내를 천천히 걸으며 “여기가 대통령 사는 데라꼬?” 하시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 추석은 다르다.
유난히 긴 열흘 연휴지만,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뿐. 요양원 면회실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스민다.
2.
조금씩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엄마와의 이야깃거리를 위해, 나는 아빠가 생전에 쓰셨던 수필집 두 권을 들고 갔다.
엄마는 낯익은 표지를 보더니 이내 알아보셨다.
“그거 아빠 책 아니가?”
“맞아요.”
책장을 넘기다 아빠의 젊은 시절, 절친한 친구 세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나는 엄마의 귓가에, 사진 속 아빠 친구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드렸다. 익숙한 옛 이름들이었는지, 엄마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3.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그중 한 친구분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고 했다. ‘같이 어울리긴 하지만, 넌 내 아들뻘이지’라는 뜻이었다나?
“아빠 참 장난꾸러기셨다, 그죠?”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자 엄마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같다, 못 믿겠다.”
나는 엄마를 더 웃겨드릴 요량으로 한마디를 더 얹었다.
“엄마, 나 낳을 때 배도 하나도 안 아프고 ‘순풍!’ 낳으셨다면서요?”
그러자 엄마는 깔깔 웃으시더니, “그랬나? 그러면 니 이름을 함순풍이라 할 걸 그랬다!”라고 했다. 그 말에 나와 아내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우리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엄마가 말했다.
“내가 이런 좋은 아들을 낳았구나.”
그리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나를 기막히게 만드는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근데… 니가 누고?”
5.
“엄마! 나는 셋째 아들, 함태진이잖아요.”
그러자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또 묻는다.
“그럼... 내 이름은 뭐고?”
순간 내 웃음이 잦아들었다.
’설마, 엄마가 자신의 이름마저 잊은 걸까?‘
나는 엄마의 귀에다 엄마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드렸다.
“엄마는 최 OO이잖아요.”
그러자 엄마는 피식 웃었다.
“그렇나? 근데 니는 어째 이리 아는 게 많노?”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엄마의 말들.
“엄마 닮아서 그래요. 엄마 닮아서 나도 호기심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요.”
그러자 엄마가 또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인물은 아빠 닮았제.”
나는 활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6.
잠시 후, 엄마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아빠는 어디 계시노?”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엄마. 아빠는… 돌아가셨잖아요.”
그 말에 엄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언제?”
“십 년도 넘었어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엄마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보고 싶어라.”
그 한마디에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엄마, 나도요. 나도 아빠가 보고 싶어요.’
나는 입을 다문 채, 마음속으로 말했다.
7.
짧은 면회를 마치고 요양원 문을 나서자, 흐린 가을하늘에 구름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다. 오늘 하루만큼은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하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2025년 10월)
Photo Credit: Unsplash @alexis_anton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