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안 오셨지
50년 된 단팥죽집엔 10년, 20년, 30년, 심지어 40년 전부터 찾아오신 손님들까지, 세대별 단골이 참 많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일하신 큰 이모는 그 오랜 단골들을 한 분 한 분 기억하고 계신다. 손님들 역시 그런 이모가 있어서인지, 올 때마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인사를 건넨다.
학생 시절 연애하던 커플이 이제는 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 손을 잡고 오고,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가 친구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해외로 이민을 갔거나 외국에 거주 중인 손님들이 한국에 올 때마다 꼭 이곳을 찾는 모습이었다. “어릴 때 먹던 추억의 맛”, “한국의 정이 담긴 맛”이라며, 귀국할 때마다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오시는 분들. 혹은 집에 아픈 가족이 있어, 이곳 단팥죽만큼은 꼭 사가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어느덧 6개월. 나도 이제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신 큰 이모에게는 이 가게가 곧 ‘집’ 같은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자주 오시는 손님들의 얼굴이 하나둘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가 불편해 새알을 빼달라고 하시는 손님, 올 때마다 차가운 생강대추차를 한 잔씩 사 가시는 손님, 단팥죽을 열 그릇 주문하면서 고명과 새알은 빼고 오로지 팥물만 찾으시는 손님, 저녁 러닝을 하다가 들러 1분 만에 식혜를 원샷하시는 분까지. 그 개성 있는 주문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게 되는 일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 한 할아버지께서 말없이 가게로 들어오셨다. 마치 원래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조용히 한 자리에 앉으셨고, 주문을 받으려 다가간 나에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조금 이따 주문하겠다”라고만 하셨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무렵, 비로소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원래는 단팥죽을 먹지만, 오늘은 쌍화차를 마시고 싶다”며, 단팥죽은 포장해 달라고 하셨다. 쌍화차 한 잔을 조용히 다 드신 후, 쌍화차 세 병을 포장해 가지고 조용히 가게를 나서셨다. 그분이 나가신 뒤, 큰 이모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저분, 예전엔 정말 건강하셨는데… 정말 오랜만에 오셨어” 씁쓸한 표정 속에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 만에 오셨는데 몸이 불편해지신 분,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다녀가신 뒤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분도 있다. 그럴 때면 큰 이모는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아마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못 오시는 거겠지…”
말끝에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는 그 이모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손님들과 주문을 주고받으며 나눈 짧은 대화, 그 사이 스치듯 지어진 옅은 미소들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 마음에는 이 가게를 찾아와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 순간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중함이 함께 담겨 있다. 이모처럼 나도 언젠가는 단골손님 한 분 한분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단팥죽 한 그릇에 담긴 정(情)과 시간의 무게를 느끼며, 오늘도 나는 이 자리에서 따뜻한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