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 익숙해지는 순간
오랜만에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따스한 햇볕이 비추었다. 가만히 있기엔 아까운 날씨였다. 눈이 다 녹았을 던다스 밸리의 숲이 떠올라,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얼음 속에 잠겨 있던 숲길의 땅이 풀려 질퍽한 곳도 있었지만,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 따스한 햇살, 그리고 멀리서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까지 더하니 자연의 품에 안긴 기분이 들었다.
오늘 우리는 ‘Main Loop Trail’을 걸었다. 이 코스는 약 3.4km 길이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던다스 밸리를 대표하는 하이킹 코스 중 하나다. 길지는 않지만,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어 특별하다고 했다. 실제로 걸어보니 울창한 숲과 졸졸 흐르는 개울, 완만한 언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함께 걷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같은 공간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유니님과 걷는 숲길이 마치 처음 찾은 곳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아직 새순 하나 돋지 않은 숲 속을 걸으며 유니님은 이곳에 처음 이민 왔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숲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며 먼저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 문득, 한국에 돌아가면 길을 걷다가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 이곳처럼 밝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을까?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어린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선 불친절한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순박하고 따뜻했다고 하더라고요.” 나 역시 캐나다를 ‘친절하고 잘 웃는 나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1시간 반을 걷고 나니 적당히 땀이 나면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피자와 만두, 치킨 등 다양한 푸드코트가 있는 큰 매장이었다. 입구에는 갓 구운 빵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그 앞엔 토마토, 사과, 귤, 아보카도 같은 신선한 과일들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넘쳤고, 매장 전체에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우리는 점심으로 먹을 캉파뉴를 사서 돌아왔다. 오늘 지나던 마을은 작고 아늑했다. 북적임 없이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며칠 전 들렀던 도서관이 눈에 띄고, 그 근처 숲길도 어렴풋이 보였다. 예전에는 잘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니, 이곳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여행은 늘 바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유명 관광지를 돌고, 맛집을 찾아가며 인증사진을 찍었다. 하루라도 더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따라왔다. 하지만 '살아보기'는 달랐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그곳의 일상이 내 일상이 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곳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동네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사 먹고, 시장에서 장을 보며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하루를 보낸다. 같은 골목을 거닐며 아침과 저녁의 분위기가 무엇이 다른지, 날씨에 따라 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지나가는 차에서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는지, 이런 작은 변화를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또한, 관계의 변화도 경험할 수 있다. 며칠간 머무는 여행자에게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둔다. 하지만 한 달, 혹은 그 이상 머물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제는 오랜만에 외출하는 옆집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유니님에게 내가 가족이냐, 친구냐고 물었다. 유니님이 “친구”라고 소개하자, 아저씨는 엄지를 치켜들며 “베스트 프렌드!”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어느새 이곳에 스며든 나를 발견했다.
'살아보기'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조각을 경험하는 일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며, 나만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나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여행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