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니 불행할 수밖에요
밤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늘 하는 생각입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12시고 새해 종 치는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날짜는 어느새 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걸 얼마나 반복하면 이 지구에서의 시간이 정말로 끝이 날까요?
지루함에 시계를 주시할 때는 약 올리듯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뭔가에 몰두한다고 눈길을 떼는 순간 빨리 감기를 해버리는 시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도깨비 같습니다.
시간과 노력이면 세상 어떤 것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 시간을 더 가져다주지 못한다._맷 폭스
그러나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에 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요. 오늘 쓴 십만 원을 다시 만회할 확률은 높지만 오늘 쓴 시간을 다시 회복할 방법은 백만 원을 줘도 천만 원을 줘도 없는 게 사실이죠.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수입, 지출을 꼼꼼히 기록해가며 가계부를 쓰고 돈을 관리하지만 시간은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나 나오는 물처럼 흐지부지 쓰며 흘려보냅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바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어요.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나의 생각, 감정을 넘어 운명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계발 차원의 시간관리를 넘어서서 시간을 자각해야지만 나를 발견할 수 있어요.
나의 가치, 이상을 알아보는 것에 이어 다음으로 나를 이해하는 방법은 시간 감사(Time Audit)입니다.
저는 2019년 10월에 시간 감사를 시작했어요. 회사를 다닐 때는 퇴근 후 그냥 놀기만 해도 죄책감이 덜했는데 월급과 제 시간의 거래가 끝나자 24시간이나 되는 시간의 쓰임이 순전히 저의 재량이었고 제 책임이 되었습니다.
퇴사하고 두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자 무서워진 저는 대충 엑셀 시트를 만들어 Time Wallet(시간 지갑)이라고 이름을 짓고 시간의 쓰임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격상 스프레드 시트에 이가 빠진 곳이 거슬리기 시작했고 시간은 지나가버리면 월리보다도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기에 구멍을 메꿀 방법이 딱히 없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어요. 점점 딱히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닌 시간 기록에 목을 매게 되었고 5분 단위로 엑셀 시트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가 지금 시간 감사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시간 기록을 하며 1분도 허투루 낭비하지 말자는 뜻도 초 단위로 생산성 있게 살자는 뜻도 절대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는 시간 낭비라고 하는 행동에 하루 종일을 할애한다고 해도 그게 나에게 행복 같은 중요한 가치를 준다면 저는 무조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몇 달간은 한 칸도 빠짐없이 기록을 하며 어디에 얼마나 시간을 썼는지 통계도 내고했지만 또 몇 달은 전혀 기록을 안 하며 살기도 했어요. 완벽해지고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더 친해지고 나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함일 뿐이에요.
저는 연예뉴스를 보면 인류애가 사라지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편이에요. 근데 저녁 여가 시간 전체를 연예뉴스 읽는 데 사용하고 나서 왜 나는 기분이 이렇게 안 좋을까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운동을 빼먹고 소셜미디어 스크롤만 열나게 내리다가 허무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매초가 무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_요한 볼프강 괴테
우리는 매 순간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회를 받아요. 지금 서있는 곳을 이해하려면 내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알아야만 하죠.
시간 감사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 생각과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감사에는 다른 여러 장점이 있어요.
1.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시간에게서 주도권을 돌려받는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일들에 쏟는 시간을 나의 행복을 위한 시간으로 대체하는 순간 두배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2. 목표를 이루기가 쉬워진다
내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 윤곽이 더 정확히 드러나면 대충 추측할 때에 비해 의식적으로 더 중요한 일과 목표를 위해 되찾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습니다.
3. 시간을 더 생산적으로 보내게 된다
인터넷 브라우징이나 소셜 미디어는 파리 끈끈이처럼 앉는 순간 엉덩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죠. 나도 모르는 새에 순식간에 시간을 앗아가는 덫이나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나의 행복이나 목표와 무관한 곳에 보내는 시간을 인지하게 되면 시간이 더 늘어나서 그 시간을 더 생산적인 활동으로 대체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이런 장점들이 있지만 결국엔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시간 감사는 어떻게 하느냐...
정확한 감사를 위해서 휴가 중이라거나 마감 때문에 평소보다 바쁘다거나 하는 특별한 기간보다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주를 고릅니다.
일하는 시간을 포함시키고 안 시키고는 자유지만 일하는 시간도 포함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휴식시간에 동료와의 수다나, 업무시간에 웹서핑 등 직장에 있는 동안에도 어디에 시간을 할애하는지 알아서 나쁠 것은 없겠죠. 물리실험이나 기술 개발할 때처럼 수집하는 데이터양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핸드폰에 있는 칼렌더를 이용하거나 다이어리나 노트에 직접 적어도 되고 편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타임 월렛은 제가 시간을 기록하려고 만든 간단한 포맷이에요. 15분으로 시간 간격을 좁히거나 한 시간 단위로 기록 단위를 올려도 되지만 데이터 분석하기도 편하고 해서 저는 삼십 분이 가장 적당한 것 같아요. (타임 월렛 링크, 다운로드)
RescueTime이나 Toggl Track 같은 시간 관리용 앱도 따로 있습니다. 포스팅을 위해서 Toggl을 써봤는데 편리하긴 하나 저는 계속하던 대로 구글 sheet을 이용해 쓸 것 같아요. 이 시간 기록을 나중에 어디에 쓸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가공되지 않은 채로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제삼자의 서비스를 쓸 경우 언제 서비스 종료가 될지도 모르고 데이터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데이터베이스에 보관하는 것보다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서 Reminder나 알람을 이용하지 않으면 금세 내가 뭘 했는지 까먹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핸드폰 배경화면에 적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아니면 시간 기록 앱이나 프로그램을 핸드폰 바탕화면 가장 앞에 두고 나머지 앱을 다 뒤로 옮기는 것도 기록하는 걸 기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미 잊어버린 부분들은 쿨하게 무시하거나 친구와의 메신저 대화, 사진, 카드 결제 기록 등을 통해 수습할 수 있어요.
기록을 적어도 5일 동안 반복합니다. 주말을 껴서 5일도 좋고 평일로만 5일을 해도 괜찮아요. 저는 주말을 끼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게 다예요. 시간을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쓰자기보다는 자아 발견과 해방을 위해 점검을 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결과가 뜨악스럽거나 시간의 잘못된 사용이 불행의 원인이다 싶은 분들은 아래의 추가 스텝을 진행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음이 과거와 미래로 도망갈 때 우리의 행복은 공격에 취약해집니다. 나의 시간 사용 패턴에 대해 인지한 것만으로도 시작이니 처음부터 너무 완벽하게 시간을 사용하려 자신을 압박 말고 가장 사소하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부터 살펴봅니다.
이때 기준은 시간을 보낸 방법이나 행위가 나의 행복이나 원하는 가치를 얻는데 긍정적이었냐 부정적이었냐로 구분하는 것을 추천해요.
이걸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친구와 만나 맥주를 실컷 마셨다고 했을 때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에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요새 뱃살이 많이 나와 고민이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운동가는 걸 포기하고 맥주를 마셔댔다면 부정적인 평가도 가능해요. 이런 경우는 중립으로 해놓고 확실하게 부정적인 시간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포맷에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고 싶은지 미리 적어놓고 하루의 끝에 실제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비교해봅니다.
ex)
이때 계획한 대로 진행을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신에게 가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평생 가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정답은 없습니다.
ex) 일 50%, 여가 10%, 운동 5%, 집안일 10%
전체적인 통계를 보고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시간 관리 계획을 세워봅니다.
ex)
일 50% -> 45%
운동 5%-> 10%
오피스라는 미국 시트콤에서도 시간 감사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주인공 마이클의 상사인 젠은 마이클이 과연 업무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는지 미심쩍어서 오피스 비서인 팸에게 마이클의 하루 일과를 적으라고 시킵니다.
팸은 마이클이 오전 10시에는 코스비라는 사람의 흉내를 냈고 오후 12시에는 회사 건물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프레츨을 받으려고 줄 서서 기다렸다고 적어요. 그리고 마이클은 온갖 토핑을 얹은 프레츨을 먹고 슈가 러시 때문에 잠들어 버리죠. 이렇게 보면 당장 마이클을 잘라버려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달라요.
퇴근 전 마이클은 젠도 놀랄만한 큰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사실 오전에 코스비 흉내를 내고 노는 것처럼 보였던 게 중요한 계약 건에 대한 전화였던 거였죠.
강박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결과나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아요. 시간은 결국 상대적입니다. 그러니 현재에 깨어있는 게 중요하지 일분일초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시간 기록도 삼십 년 후에 나 저 때 저걸 하고 저걸 먹었구나 하는 추억용 정도로 소장될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시간 감사를 통해 시간에 감사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간은 나의 편이다. _믹 재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