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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강진역 Sep 29. 2024

3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

격변의 시작


1



복직, 주말 부모 생활, 이사라는

사적 영역의 변화


부서 이동, 미래전략실 해체, 사무실 이사 등

공적 영역의 변화까지  


이 모든 게 3개월 사이 수진에게 일어났다.

  


개인적인 변화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회사에 오면 드러내지 않았다. 회사 사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예 잊어버렸다. 사적인 일로 업무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는 새벽 두세 시까지 일을 해야 했지만 그 부분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주중에 시댁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를 보러 매일 경기도로 출퇴근하고 싶었지만 일찍 퇴근하는 날만 그렇게 했다. 하루빨리 회사 어린이집 입소를 시켜 매일 아이를 보고 싶지만, 이런 마음을 어디서도 드러내진 않았다.



여긴 회사니까.




 


수진은 변화된 일상에 하나씩 적응해 갔다.



업무 변화가 가장 컸다. '중고신입'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생전 처음 하게 된 새로운 업무도 차차 익숙해져 갔다. 미숙함의 연속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되뇌며 견뎌냈다.



"안녕하세요, 이수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업무는 처음하시는 거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나이도 있으신데..."


고객사 담당자가 미심쩍은 마음을 내비치자 선배가 나섰다.

"수진 프로가 빨리 배웁니다. 제가 옆에 밀착해서 챙기겠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 그렇지만 중고신입이시잖아요. 우리가 무슨 중고신입 양성소도 아니고.."

"책임님, 잠깐만 저랑 담배 한 대 태우실까요? 하하..."



서른 넘은 나이에, 7년 차 대리가 후배에게 핀잔을 듣는 순간도 참아내야 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네'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그들도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내 심정을 알겠지 하며 삼켜냈다. 자존심이 상해도 새로운 업무를 익히려면 으레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후배는 다른 선배들에게 쓰는 '선배'라는 호칭도 수진에게는 쓰지 않는다.



"프로님만 끝내시면 다 퇴근하는데, 오늘도 새벽까지 하시겠죠?"

"아 죄송해요, 프로님. 최대한 빨리 해볼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프로님 적응하실 때까지 새벽 퇴근 예상하고 있으니 편하게 하세요."


말은 그렇지만 표정은 빨리 끝내라는 소리다. 수진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다 못해 너덜너덜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3개월을 견뎌내니 이제는 조금씩 수진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빨리 배우네, 제법인데?', '이제 혼자서 다 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기 시작하고, '수진 프로님께서 기획해 주시면 믿음이 가죠'라는 말까지 들렸다. 하지만 칭찬을 듣는 날에는 꼭 하나씩 실수가 나왔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하는 법을 배웠다.   



"어? 프로님, 생각보다 손이 빠르시네요? 단축키 벌써 다 외우셨어요?"


수진은 조용히 후배에게 미소를 날리고 아무 말 없이 업무에 집중한다. 일부러. 프로답게.


"언제 저녁 같이 하실래요? 지난 번 기획 너무 좋았다고 제가 프로님 덕분에 칭찬 받아서 좋은 곳 모실게요." 

"어머, 책임님, 다행입니다. 전 그냥 월급값 하려고 한 것 뿐인데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고객사도 어느새 수진을 마음에 들어한다. 



주말 부모는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아이를 낳고 14개월 동안 하루도 떨어져 본 날이 없었다.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 허전함에 하늘이 무너져 내릴 줄 알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첫날은 시댁에서 같이 잠을 자고 새벽 통근버스로 출근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마음이 괜찮았다. 회사에 오니 금방 아이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물론 이따금 아이 사진을 보며 아린 마음을 몰래 달래야 했지만.



이사도 잘 마쳤다. 이삿날에는 아이를 시댁에 그대로 맡기고 진행했다. 금요일에 이사하고,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치고 나서 토요일 저녁에서야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는 낯선 집에 오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내내 울었다. 결국 집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새벽 내내 거실 불을 켜고 낮처럼 놀아줬다. 그렇게 15개월 아이는 새집에 적응할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새벽 6시에 잠이 들었다.



만 1세가 지난 첫 3월이 되니 회사 어린이집 입소 가능 조건이 됐다. 주말부모 생활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했기에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수진이었다. 드디어 연락이 왔다. 어린이집 낮잠용 이불을 사고, 네임스티커도 주문했다. 아이 물건 하나하나에 네임스티커를 붙이며 입소 준비를 마쳤다. 적응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이가 잘 지내줄지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이제 매일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등원 첫날부터, 출근과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는 아침은 전쟁터 같다는 걸 깨달았다.





"우성아 얼른 일어나자, 어린이집 가야지."

"애가 왜 이렇게 못 일어나? 아침에 벌떡 벌떡 나는 잘 일어났는데."

한결은 바쁜 아침에 수진의 속을 긁는다. 


"16개월 때 일이 기억난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애 치카 시켜줘."

"애가 스스로 하게 해 줘야지, 너는 너무 다 해줘."

"아 내가 할게, 얼른 기저귀나 갈아줘."

"기저귀 어디 있는데?"

"어제 로켓배송 온 거 현관 앞에 있어."

"이런 건 미리미리 뜯어서 정리를 해놨어야지."

"내가 할게. 그냥 둬!!!"



결과 수진의 전쟁 같은 아침 일상이 시작됐다. 수진은 어린이집 등원 미션을 성공하고 사무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회사에 오면 피곤했는데, 이제는 회사에 오면 쉬는 느낌이 들 정도다. 수진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이 시간에 감사함을 느낀다.   



회사 생활의 변화에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미래전략실 해체의 여파로 사무실 이사까지 마치고 나니 모두들 자존심은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했다. 개편된 조직에 맞춰 업무가 분장됐고, 각자 월급값은 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제 영업을 뛰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타성에 젖어 일하던 사람들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변화였다. 올드한 조직은 살아남을 수 없다. 시장에서 인정받는 진짜 실력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렇게 하나씩

사적과 공적 영역의 변화는 차차 새로운 일상이 되어갔다.




2



2017년 3월 10일 금요일 오전 11시.

수진은 일주일 중 가장 한가로운 금요일 오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아, 오늘이 그날이지.'



지난 12월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 방송은 누군가 사내방송용 TV를 켜서 함께 시청했지만, 미래전략실이 해체되고 사무실까지 옮긴 지금 분위기에서 그 어느 누구도 사무실 TV를 켜지 않았다. 다들 개인 PC나 휴대폰으로 생중계를 지켜봤다. 수진도 이어폰을 꽂고 뉴스를 틀었다.



출처 | JTBC 뉴스 화면 캡처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 이정미 재판관이 선고 요지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헤어롤 2개를 말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재판관이었다. 워킹맘 카페에서 두 개의 헤어롤은 큰 이슈였다. '이 분도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워킹맘의 아침을 살고 있네요', '우리 엄마 같아요', '너무 인간적이에요', '얼마나 바쁘면 그러셨겠어요' 모두들 재판관의 헤어롤에서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며 여론은 재판관에게도 호의적인 분위기로 흘러갔다.



정말 이번에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탄핵하게 되는 걸까? 수진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뉴스를 지켜봤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때와 같이 헌재의 기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역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나올 것인지 온 국민의 눈과 귀가 헌재로 쏠렸다.  



"지금부터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선고에 앞서 이 사건의 진행경과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재판관은 차분하게 정돈된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수진은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논리에 허점은 없을지, 결국 어떤 선고를 내리려고 어떤 흐름을 가져갈지,  이 선고가 끝나면 어떤 경쟁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며 들어봤다. 어려운 법률 용어들도 자주 등장했지만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이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피청구인의 이러한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중략) 또한, 재단법인 미르와 케이스포츠의 설립, 최성원의 이권 개입에 직,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피청구인의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입니다."



탄핵심판 선고문은 점점 대통령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피청구인의 법위반 행위가 피청구인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중략) 이러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입니다."



마지막 한 문장을 남겨두고, 모두들 숨죽이며 그녀의 입을 주목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결국 여론의 물줄기를 바 수 없었다. 지난 10월 태블릿 PC로 시작된 권력을 향한 국민의 분노는 결국 탄핵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촛불집회에 한 차례 참석했던 수진은 정의가 승리했다는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지난 12월과는 사뭇 달랐다.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동료들, 뉴스를 보고 있어도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선배들이 보였다. 평상시처럼 일이나 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래, 입에 풀칠 못하면 정의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 



탄핵 이후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지, 어떤 5년이 흐르게 될지 수진은 궁금했지만 회사에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3



저녁을 먹으며 한결과 수진은 탄핵 이야기를 나눴다.



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탄핵이 되다니. 우리나라가 망하려고 하나. 국민들이 이렇게 무지하다니. 미래가 안 보이네."

"그래도 대통령이 자기 권한 남용한 건 좀 아니지 않아? 보안 문서까지 마구 공유했잖아."

"어디까지가 진실인 건지 모르는 거야. 그 태블릿이 갑자기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것도 웃기지 않아?"

"나랏일 여기저기 안 건드린 게 없다는데. 대통령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없으면 내려와야지."

"이렇다니까. 그쪽은 정말 여론 빌드업을 잘해. 아마 태블릿 뉴스 터뜨리는 것부터 탄핵까지 다 짜인 판일걸? 치밀하게 계획된 판대로 간 거야. 끌어내리려고 무당이니 세월호 봉양설이니 뭐니 별의별 선전지들 다 갖다 붙였잖아. 보수는 가오 잡느라 그런 여론전을 참 못해."  



둘의 입장은 다르지만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는다. 가족의 평화가 우선이라 생각하는 수진과 한결이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을 감추지는 않는다. 



"민초들이 다 알 수는 없지. 그래도 권력 남용하고 국정 농단한 사실은 처벌받아야지."

"저쪽이 해먹은 거, 김정일한테 갖다 준 거, 그게 더 할걸?

"어느 쪽이나 권력 잡으면 다 마찬가지인가 봐. 다음 대통령은 누굴 뽑아야 하지? 진보도 지금 진짜 진보가 아니잖아. 어느 쪽에도 인물이 없네..."

"민주당 되면 진짜 이민 알아봐야 하나..."



오랜만에 정치 얘기로 저녁 식탁이 뜨거웠다. 수진은 정치적 문제를 가정 안으로 끌어들이기 싫었다. 애써 화제를 돌리며 탄핵 이야기는 온라인에서 조용히 풀기로 했다.





한편으로 조금 혼란스러웠다. 중도 진보라고 수진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막상 진보 쪽을 들여다보니 권력을 잡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정치인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할머니와 고모와는 다른 결의 사람들만 보였다. 보수는 부패해 보였고, 진보는 무능해 보였다. 수진의 눈에는 똑똑하게 다음 5년을 이끌어갈 사람이 안 보였다.



'이러려고 대통령 탄핵해야 한다고 했나, 대안이 없네.'



누가 되든 또 한 번의 5년은 채워질 것이다.

누가 되든 시간은 흐를 것이고, 비슷한 일상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불안했다. 정치 변화가 일상까지 변화시키고 있음을 나이가 들면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땐 몰랐던 정치의 영향력.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하면 국민만 손해라는 것. 그리고 무엇이 정의인지,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후대까지 생각하게 된다는 것, 여러 가지 생각에 수진은 뉴스들을 찾아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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