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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후 3달이 되어갈 즈음, 대통령 탄핵을 바라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마지막 헌법재판소 판결만 남겨두고 있었다. 작년 10월부터 매주 진행된 광화문 앞 촛불시위는 더욱 뜨거워졌고,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파도가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평소 나라 걱정은 뒷전이던 사람들까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수진도 한때 정치를 공부했던 국민 1인으로서 방관자라는 오명을 입기 싫었다. 결국 LED 초를 들고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보수주의자 남편과 아이는 시댁에 보내고, 혼자 이삿짐 정리를 마무리하던 날이었다.
경복궁역에 내리니 차량을 통제하는 교통순경과 인파를 막기 위해 인간장벽을 만들고 서 있는 의경들이 보였다. 한쪽에는 태극기를 든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의 표정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했다. 수진은 잠시 인턴으로 근무했던, 공무원 조직과 본인은 상극임을 확인했던 정부종합청사 건물 앞에서 LED 초를 꺼냈다. 실리 추구보다 줄 서기가 우선 시 되는 행안부 조직을 보며 공무원 시험 서적을 중고나라로 보냈던 인턴 시절이 생각났다. 연거푸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을 치렀던 2008년의 봄이었다. 아웃풋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던 수진은 이곳이 맞지 않음을 알아가며 6개월을 보냈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출처 | 경북일보)
경복궁역부터 안국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1시간 남짓 걷는 동안 해가 넘어갔다.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릴 즈음 안국역에 다다른 수진의 귀에 노래가 들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가슴이 아려왔다. 수진은 천천히 걸으며 세월호 아이들을 떠올렸다. 대통령이 300명의 아이들을 계획적으로 수장시켰다는 소문도 돌던 시기였다. 그래서 노래가사 한 줄 한 줄이 더 슬프게 심장에 꽂혔고, 탄핵에 대한 열망을 달구기 충분했다.
남편 한결과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없음이 아쉽다. 한결은 보수주의 집안에 태어나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이름처럼 한결같이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다. 대위 시절 10.26과 12.12를 청와대에서 겪고, 전용기를 타고 전두환 대통령과 미국 출장을 다녀오는 등 빠르게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는 군인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준장을 달기 직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했고, 별을 달지 못하고 전역 후 육사 교수로 근무해야 했다. 학창 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앞만 보며 달려온 한결의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 이를 지켜본 한결이 진보 정당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었다. 평소 정치에는 무관심한 평범한 공대남이지만, 가끔씩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진보당은 우리나라 발전을 방해하고, 혼란을 야기시키는 무리들이라고 한결같이 비판했다.
민주화운동 집안의 수진은 정의로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그에게 가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가정이 최우선인 수진은 한결과 언쟁을 하지는 않았다. 수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가 3살일 때 성격차이로 이혼했고, 편부모 가정의 아이라는 타이틀을 혹시나 대물림하게 될까 봐 남편과의 언쟁을 되도록 피했다. 각각 서울대와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한 수진의 부모는 똑똑했지만 가정을 지키지는 못했다. 어느 쪽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헤어진 부모의 아이는 결핍이 있는 줄 모른 채 성장하다가, 성인이 되고 나면 편부모 가정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깨달아 가고, 결핍을 들킬까 봐 숨기고, 그렇게 애써 꿋꿋하게 살아야 했다. 수진은 아들에게 절대 이 경험을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진보는 현재의 행복을 우선시하고, 보수는 미래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걸까?'
어느 부부에게나 이혼의 위기는 있지만, 가치관에 따라 참아내기도 하고 결단하기도 한다. 수진의 부모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잠시 현재의 행복을 미루고 이혼을 물렀다면, 수진도 안정감 있는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그렇게 다른 삶을 살아온 둘은 하나의 가정을 이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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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에 들고 갔던 LED 초를 집에 두었다가 괜히 남편이 보면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회사에 들고 출근한 날이었다. 서랍 첫 번째 칸 구석에 내려놓고 기획안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주변 동료들이 웅성대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남자 선배들,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여자 선배들이 보인다. 수진도 사내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배님, 무슨 일이에요?"
"YJ가 청문회 때 미전실 해체하겠다고 하셨잖아, 12월에..."
"네, 근데... 설마 벌써요?"
"응, 아마 오후에 보도자료 나가고, 우리 본부도 곧 조직개편할 건가 봐."
"헉,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단 그룹 관련 팀은 다 없어지는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어. 민초가 뭘 알겠냐, 기다려봐야지."
"아...."
설마 설마 했던 일이 곧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정치권 눈치를 보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라지만, 그룹을 통합 운영하던 조직이 일순간 해체된다니. 일개 대리의 눈에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론 위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다른 배경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윤추구가 우선이어야 하는 사기업도 정치권 눈밖에 나면 효율적인 경영은 뒤로하고 민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 대중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대기업을 사회악으로 치부한다는 것, 재벌 총수를 비판하면서도 그가 입고 쓰는 것을 따라 사고 싶어 한다는 아이러니함까지. 수진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이 회의를 소집했다.
"다들 들었겠지만, 곧 미전실 해체 발표가 나면 전략팀과 그룹팀은 다른 팀들로 배정될 겁니다."
수진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는다.
"오성미디어는요?"
"없어지는 거지. 앞으로 '그룹'이라는 단어도 금기어야. 사내든 사외든 어느 자료에도 앞으로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왔어."
"그룹분담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게 문제야.... 우리가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않은 조직이잖아. 근데 우리도 이제 경쟁 PT 들어가서 수주해 오고, 영업하고 해야 할지도 몰라. 다들 마음의 준비들 하고 있어."
"그럼 관계사들이랑 갑을 관계가 되는 거예요?"
"계약서 상 그런 셈인 거지. 지금까지 우리가 미전실 감투 쓰고 편하게 일했던 거, 이젠 잊어야 할 거야."
수진이 애정을 쏟아 일했던 '오성미디어'가 곧 사라진단다. 기업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내 커뮤니케이션으로 내부 결속을 이끌며 자부심을 온라인 매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수진은 우울해졌다. 수진뿐만 아니었다. 정의감에 불타올라 탄핵안 국회 통과에 박수를 쳤던 동료들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설마 설마 했는데, 현실이 되고 있었다. 공기업처럼 편안하게, 강도는 높지만 대우받으며 일하던 삶은 이제 더 이상 없을 위기에 놓였다.
수진의 조직은 그룹분담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성그룹 각 계열사가 낸 분담금을 사용하니 실적 압박 없이 그룹 또는 관계사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다. 주로 미래전략실 지시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다 보니 업무 강도는 높지만, 그룹 일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밤샘도 불사하며 인정받기 위해 각자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한때는 신경영 선언의 발단이 된 회장 보고 영상을 제작한, 존재감이 꽤나 큰 조직이었다. 그런 만큼 사명감으로 일을 했고, 오성테크에서 일할 때보다 '더 중요한, 더 큰' 일을 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으로 힘듦을 참아낸 수진이었다. 뱀의 머리보다, 용의 꼬리가 낫다며 존재감 있는 업무에 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사람 때문에 힘들지, 일 때문에 힘드냐?'
이런 생각으로 버텨온 지난 3년이었다. 고생만 하고, 티는 나지 않는 잔챙이 업무들이 몰려와도 꿋꿋하게 해내고, 가끔은 사이가 좋지 않은 팀장도 어쩔 수없이 수진의 필력을 칭찬했기에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사람이 아닌, 일만 보고 살자고 아침마다 다짐하며 출근한 수진이었다.
복직하며 1월부터 이미 옆 부서로 옮겼기에 당장 수진의 업무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룹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예전 팀원들 몇몇은 수진과 다시 만났다. 모두들 애써 웃어 보이며, 이제 새로 돌파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으쌰으쌰 했다.
탄핵소추안 가결로 흥겨웠던 분위기는 그렇게 차갑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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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없던 갑을관계가 시작됐다. 그룹팀이었던 몇몇 선배들은 휴직을 했고, 나머지는 마음에 난 상처들을 나름의 방법들로 치유하며 버텨냈다. 어제는 그룹 업무 담당자로 대우를 받았지만, 오늘은 철저한 을의 대우를 받아야 했다. 모두의 서러운 순간을 견디게 해 준 건, 남은 대출이자와 할부금이었으리라.
지금까지 평생 경쟁 입찰에 뛰어들어보지 않았던 팀장들은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해야 했다. 어제까지 협력사였던 회사들과 이제는 나란히 경쟁 입찰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체질개선을 해야 했다. 마치 공기업 직원처럼 편하게 살아오던 본부원들은 하루아침에 영업사원으로 완벽히 바꿔야 했다.
"이제 완전히 을이 되는 거네요."
"지금까지 미전실 감투 쓰고 편하게 살았던 거지."
"그러게요, 미전실 업무가 빡세긴 해도, 대접받으며 편하게 일하긴 했잖아요."
"대우받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제 진짜로 돈을 벌어야 하는 조직이 된 거잖아."
"휴우, 그러니까요. 우리 뭐 먹고살죠?"
"올해는 어찌어찌 넘어가도, 내년이 문제겠네. 벌써 박 차장도 하반기에는 우리 회사랑 안 할 수도 있다고 살짝 흘리잖아."
"하기사, 그동안 안일하게 살긴 했죠."
"우리가 만든 게 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바닥부터 올라온 애들이랑 게임이 될지 불안하다."
수진의 본부는 미래전략실 해체의 직격탄을 맞은 조직 중 하나가 됐다. 경쟁 수주 필요 없이, 그룹 분담금을 지급받으며 업무에만 집중하면 됐었다. 하지만 이제 영업사원처럼 일을 해야 한다. 비용 절감을 위해 사무실도 이사를 해야 했다.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길 건너 빌딩으로 옮기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지원팀 분석이 나왔고, 본부원들은 곧 짐을 싸야 했다.
수진은 넋두리를 했다. 안정적이던 조직이 흔들리고, 내 생활이 무너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굶어 죽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정치적 사건으로 내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길 줄 몰랐어."
잊고 살았던 회사의 소중함을 상기하는 수진. 생각해 보면 의, 식, 주의 안정은 모두 회사 덕분이다. 수진의 모든 생활에 안정감을 준 회사다.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온 자랑스러운 회사였다. 수진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곳에 속해 있기에 대접받던 스스로의 위치를 자연스레 깨달았다. 작은 미물에 불과한 자신을 깨닫자 더 겸손하게 일하기로 마음먹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나도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이 업무도 잘하고 있잖아.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반드시.'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건 K직장인의 기본 소양이다. 수진은 이 조직이 지금 상황을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숱한 굴곡을 다 이겨내고 지금의 안정을 찾은 수진과 회사이기에 스스로의 힘과 조직의 힘에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수진과 수진의 조직은
새로 이사한 길 건너 사무실에서 봄을 맞이했다.
그렇게 2017년의 봄이 흘렀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