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대기업 7년 차 대리다. 강남역 회사 근처 재건축을 앞둔 서초우성1차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진급을 앞두고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바람에 과장 승진은 멀어졌다. 어차피 가늘고 길게 다닐 회사, 미련 없이 육아휴직 1년까지 꽉 채워 썼다. 자기애만큼이나 모성애가 강했던 수진은 아이와 행복한 1년 2개월을 보냈다.
"프로님, 안녕하세요. 복직 절차 안내로 전화드렸습니다."
인사팀 전화를 받으니 출산휴가 전 마지막 출근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출산휴가 3달 중 1달은 임신 초기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지 분리해서 사용했었다. 한 차례 유산을 겪었던 수진이기에 14주 차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 본격 출산휴가를 들어가기 전 HR시스템에 휴가 근태를 상신하려던 수진은 블록 상태에 막혀 직접 올리지 못했다. 분리해서 사용한 휴가는 인사팀의 수동 처리가 필요했던 것. 분명 인사팀에서 팀장까지 포함해 이 상황에 대한 안내 메일을 보냈는데, 이를 잊은 팀장은 팀원 모두 앞에서 만삭의 임산부를 향해 큰 소리로 모욕감을 줬다.
"이 프로, 아직도 근태 안 올렸어?
출산휴가 들어가면서 전날까지 근태 안 올리는 사람이 어딨어? 이해할 수가 없네! 어?"
팀원들 모두가 일순간 수진을 주목했다. 만삭의 임산부 수진은 모욕감에 팀장에게 바로 소리를 치며 대응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도제식 분위기의 이 조직에서는 '버릇없는 후배'로 낙인찍히는 행동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팀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팀원에게 호통을 쳤어도,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항변하는 것이 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2년간 터득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계열사에서 전배 온 중고신입이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과정인지 모른다.
"아까 인사팀에서 보낸 메일 보셨겠지만 제가 직접 상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사팀에서 처리하는 대로 상신하려고 대기 중입니다."
이렇게 팀장이 준 또 한 번의 수모를 참아냈다. 절대 이 조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자격증 시험에 합격해 보란 듯이 이직에 성공하고 이들보다 더 잘 살리라 다짐했다. 육아휴직을 곧 기회로 삼으리라 결의를 다지며.
"이 지긋지긋한 조직!"
하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젖을 물리며 인터넷 강의를 보고, 아이가 잠들었을 때 책을 보면서, 청소와 빨래와 신생아 돌보기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친정 엄마는 이따금 와서 도왔지만 신생아 돌보는 일보다 청소와 설거지에 더 집중하는 바람에 아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수진이 듣던 강의를 끄고 방에서 나와 아이를 안고 달랬다.
뒤늦게 자격증 준비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시험 전날 며느리를 위해 아기를 봐주겠노라 했다. 시험 전날에라도 혼자 도서관을 갈 수 있겠구나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저녁 6시나 되어 집에 도착했다. "아들이랑 손주 먹일 것 하다 보니 늦었네. 자, 이제 공부해라"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 저녁 시간이 되자 아이는 엄마를 더 찾았다. 이렇게 본 시험을 잘 볼리가 없었다. 벼락치기로 살아온 수진, 이 자격증은 벼락치기로 쉽지 않은 시험임을 느끼고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이직은 멀어졌다. 모유수유 중인 아기 엄마에게 시험 낙방의 핑계는 다양했다. 실패감에 한동안 괴로웠지만 아기를 보며 치유했다. 고맙게도 희망고문 없이 1차에서 떨어졌기에 2차를 준비할 필요 없이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길게 보낼 수 있게 됐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아이와 남편만을 바라보며 남은 육아휴직 기간을 보냈다.
시민단체에 오래 근무한 수진의 친정엄마도 내심 이직을 바라지 않았다. 꿈 때문이었다. 오성테크 최종 면접을 앞두고, 친정엄마는 꿈 속에서 강남역 빌딩숲 사이 대나무들이 울창한 길을 걷고 있는 친구와 친구 남편을 만났다. 친정엄마의 친구 남편은 당시 오성전자 상무이사였기에 합격을 예지하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진에게 꿈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가,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수진에게 꿈 이야기를 전했었다.
"얘, 엄마가 사실 며칠 전에 꿈을 꿨었는데, 이상했어. 강남역 한복판에 대나무숲이 있니?"
"응, 엄마가 면접 날 새벽에 데려다준 건물 있잖아, 거기 주변에 대나무들이 조금 있어."
"어머, 니가 오성 붙을 거라는 꿈이었나봐. 꿈에 혜성이랑 안 상무님이 거길 산책하는 꿈을 꿨거든."
"정말? 어머 소름!"
당시에는 판교에 위치한 오성그룹 계열사에 지원했을 때라, 놀라기는 했지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3년 뒤, 수진이 결국 강남역 오성타운에 근무하게 되자 수진과 그녀의 엄마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웬만하면 이직을 안하고 니가 오성을 쭉 다니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뜻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어..."
"내가 죽겠다니까, 엄마는 맨날 뉴스 보면 오성이 잘못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왜 내가 오성 다니는 건 좋아해?"
"경영진이 잘못하는 거랑, 네가 거기서 능력을 펼치는 건 별개의 문제지."
수진도 마음 한 켠에 이 꿈이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날들에는 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마치 엄마의 꿈에 이끌려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다. 이번에도 이직을 위한 몸부림을 이리 저리 쳐봤지만,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2
"이제, 돌아가서 진짜 이수진을 보여주자."
마지막 날까지 좋은 기억이 없기에 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회사다. 다른 회사를 알아볼까도 싶었지만 회사원 조직생활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크다. 또라이 보존 법칙에 따라 어딜 가나 또라이는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좁은 취업문, 문과 여자에겐 더 좁기도 하다. 게다가 수진이 안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삼고 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다. 글을 마음껏 쓰기 위해 들어온 조직이었다. 대기업 안에서 글을 업으로 삼으며 안정적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직은 많지 않다.
사원 시절을 보낸 계열사는 제조업이었다. 개인주의에 물들어 살아도 숫자가 드러내는 결과로 인정받던 기술영업 해외담당 조직이었다. 사수가 '천상천하 이수진'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안하무인인 수진이었지만, 얄밉게도 성과를 내는 바람에 모두들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사내 교육을 하면 1등을 해오고, 신입사원 능력개발지도관찰제에서도 1등을 하며 혼자 미국 CES 참관까지 다녀오니 팀의 입지를 높여주는 수진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주재원 대행으로 파견된 상하이에서 적자 고객사와 수 차례 미팅을 혼자 추진해 가며 가격 인상과 매출 신장을 동시에 이끌어낸 수진이었다. 그런 수진의 근성과 욕심을 보고 팀장은 사원으로서 받기 힘든 최고 고과를 줬다. 고객사들이 공장을 지을 때마다 조언을 구하던, 공과대학 교수 학자 스타일의 팀장이었다.
그렇게 인재 취급을 받던 수진은 3년 동안 성과를 냈지만, 매일 똑같이 출근하면 SAP에 접속하고, 고객사에 메일을 보내고, 엑셀 파일들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일상이 지겨웠다. 일개 부속품처럼 일하는 것에 성취감이 오지 않아 입사 3년 차부터 그룹사 임직원 기자단으로 활동했고, 본인 이름을 걸고 쓴 글이 40만 임직원이 볼 수 있는 플랫폼에 게재되고, 가끔은 뜨거운 호응을 얻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입사 4년 차에 수진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1년간의 임직원 기자단 활동을 마칠 무렵, 편집팀에서 제안을 받은 것. 수진은 일생일대의 기회라며 전배를 결심했다. 홍보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곳에서 남은 인생을 걸고 일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쌓은 커리어를 무너뜨리지 말라며 반대하는 팀장에게는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할아버지의 글을 내보이며, 글쟁이 집안의 피가 끓어 어쩔 수 없음을 어필하며 감행한 전배였다. 당시의 팀장은 그런 수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제조업을 떠나 이곳에 오면 창의력이 무궁무진하게 자라나고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수진은 전배 3개월 만에 후회했다. 호칭부터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는 수직적 조직 분위기에서 '창의성' 보다는 '경직됨'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조업 회사보다 더 수직적인 분위기임을 느꼈다. 수진은 습관적으로 예전 조직에서 하던 대로 '개인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이는 곧 '버릇없는 후배'가 되어 선배가 팀장에게 이수진에 대한 악평을 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팀장은 뒤늦게 조직에 합류한 주제에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수진을 더욱 못마땅해했고, 수진은 삐그덕 거리는 관계 속에서도 1차례 유산과 1차례 출산의 과정을 보고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수진은 2년 연속 하위고과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런 조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다니. 이 현실이 참혹했다.
3
"네, 12월 9일에 뵙겠습니다."
제발 오지 않았으면 했던 복직일은 다가오고야 말았다.애써 잊고 지냈던 복직, 인사팀 전화를 받으니 결국 실감이 난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할 수 있는 곳은 여기다. 현실주의자 공대남 한결과 결혼한 수진은 이상주의자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편한 곳으로 옮기거나, 비정기적인 수입을 감수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한결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수진 또한 아이를 가진 엄마가 응당 가져야 하는 책임감만 생각하며 현실을 수용하기로 한다.
"더 이상 개인주의적으로 살지 말자. 조직에 순응하자."
돌이켜보니 전배 후 새 조직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길 바란 것도 욕심이고, 겸손하게 선배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도 인정해야 한다. 콘텐츠 기획과 제작 업무는 '과정'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업무다. 오타 한 글자가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중간 컨펌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했다. 그렇게 팀워크가 중요한 집단으로 전배를 왔음에도 고집부리며 개인행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수진은 자신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제 슬슬 복직 준비를 해야 한다. 수진은 미용실 예약부터 한다. 휴직 전에는 마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숙제였다면, 복직 전에는 미용실을 가는 것이 시급한 숙제다. 출산 100일에 왔던 탈모 덕분에 새로 자라났던 이마 라인 잔머리가 이제 얼추 앞머리처럼 길었다. 일 년 동안 질끈 묶고 머리띠로 수습하고 다니던 머리를 풀고 C컬 매직 세팅펌을 하니 한결 직장인 같다. 거울을 보며 멋들어진 워킹맘으로 살아갈 모습을 그려본다. 핏플랍 슬리퍼에 에르고 아기띠를 두른 아줌마 대신, 구두를 신고 명품백을 든 커리어우먼을 상상하니 기분이 썩 괜찮아진다.
모유를 좋아했던 14개월 아들은 한 달 전부터 분유에 적응했다. 단유는 유두에 김칫국물을 바르는 방법으로 했다. 계속 유축해서 먹일까도 생각했지만 몇 시간에 한 번씩 유축을 하는 건 업무와 병행이 어려울 것 같아 단유를 결정했다. 그런데 임신도 출산도 거뜬했던 건강 체질 수진은 단유 젖몸살이 이리 무서운 줄 몰랐다. 가슴이 갑자기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졌고 뜨겁게 타는 듯한 열감에 괴로웠다. 차라리 계속 모유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복직 전 단유를 해야만 한다. 결국 회당 6만 원 하는 단유 마사지를 3회 받고 전문가의 손길 덕분에 젖몸살은 금방 무사히 지나갔다.
"당분간 아이는 시댁에 맡기자."
회사 어린이집 입소는 내년 3월부터나 가능해 당분간 평일은 할머니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늦은 10월생을 낳으면 회사 어린이집 입소 가능 시기와 복직 시기에 텀이 생긴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만 1세가 지나고 나서 매년 3월부터 입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룹에서 만든 지침인데 이유가 있겠지 하며 항변할 생각은 못했다. 안 그래도 아이 낳고 복직하며 눈치가 보이는데, 회사의 복지혜택에 항의하는 모습으로 눈밖에 나기 싫었다.
강남역 회사 근처에 살고 있는 수진은 경기도 1기 신도시 시댁에 아이를 맡기면서 '주말 부모' 생활을 시작한다. 칠순을 앞두고 퇴직하셨던 친정 엄마는 다시 조직의 부름을 받아 복직을 하셨고, 이제 막 환갑을 넘기고 일찍 은퇴하신 시부모님은 첫 손주라 애정을 쏟아주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아교육을 전공하신 시어머니의 유일한 손주라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에는 이 선택이 고부간 거리 두기의 원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자기애보다 모성애가 강한 수진은 복직을 앞두고 마음이 아렸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라고 못하겠냐며 씩씩하게 출근을 준비했다.
4
2016년 12월 9일 아침이 밝았다.
인사팀과 총무팀에 들러 사원증과 노트북을 지급받고 사무실에 들어선다.
오랜만에 책상과 명패를 마주하니 씁쓸함이 밀려온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과 다시 얼굴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
탈출을 꿈꾸며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결국 돌아왔다는 패배감,
3년 전 인정받던 부서를 박차고 나와 계열사 전배를 감행하며 이 자리에 왔으나
새로운 조직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던 지난날들이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내 책상 한 칸이 있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이 나이에, 이 월급 받을 수 있는 곳 구하기 어디 쉽겠나.
게다가 이제 애 엄마인데.
출처 | YTN 뉴스 화면 캡처
"곧 시작하겠네."
전략팀에서 3팀으로 발령 난 수진은 새로운 책상 먼지를 닦는다. 새로운 팀원들과 합을 맞추어야 하는 긴장감을 애써 억누르며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그때 누군가 사무실 TV를 켠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국회 투표 결과가 발표될 시간이 다가온다. 대기업 녹을 먹으면서도 민주화 운동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는 수진은, 지금 이 순간이 깨어있는 국민의 힘을 보여줄 기회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뉴스 화면을 바라본다.
수진은 대학에서 정치를 공부했다. 시민단체에서 오래 근무하신 어머니와 민주화운동으로 투옥까지 겪어내신 친할머니와 고모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4.19 혁명이 일어난 이유와 5.16 군사정변 이후 독재시대를 지나와야 했던 대한민국의 아픈 현대사에 대해 수없이 들어온 수진이었다. 하지만 정치를 얕게나마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정치란 정답 없는 언쟁이라는 것, 그리고 권력 싸움에 희생되는 것은 곧 국민들이고, 소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의를 위한 언쟁보다 당장의 안정적인 생활이라는 점이었다. 잠시 행정안전부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공무원 사회를 간접경험한 수진은 더욱더 회의감이 들었다. 공무원 시험은 중도에 그만두고, 대기업 취업을 준비했다.
어쩌면 1980년대생인 수진이 5.16부터 10.26까지의 독재시대, 그리고 12.12 사태와 6.29 민주화 선언까지의 시간들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진이 직접 경험한 민주화 운동은 어린 시절 세브란스 치과를 갈 때마다 횡단보도에서 본 화염병을 던지는 무서운 대학생 오빠들 뿐이었다. 이제는 그 시대를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급속한 경제 발전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고, 민주화는 경제 발전 이후 시간차를 두고 결국 이뤄냈다. 부모 세대에서 이뤄낸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감사함을 잊지 않으며 이를 누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치에 대한 관심은 끄고 가족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달려왔다.
하지만 2016년 10월 24일 모 방송사 뉴스룸에서 보도된 최서원 씨의 태블릿 PC는 잊고 살던 그녀의 핏줄을 상기시켰다. 더 이상 이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최대 안정 최대 행복'만을 바라보며 현실적으로 살리라 다짐했던 그녀가 뜨거웠던 대학 시절의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며 다시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리라 생각했던 보수 정부의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어떻게 저러한 수준의 여자에게 국가 기밀을 공유하고 의견을 들어볼 수 있을까, 얼마나 모자라면 저런 여자에게 중대한 국가적 대소사를 논의할까, 이런 생각만 가득했다. 이것이 정의인가,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짧은 시간에 이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제 거꾸로 가고 있구나 탄식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기에, 여자로서 부끄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복직하는 날, 대통령은 실직하게 될 것인가."
속으로 질문하며 애써 담담하게 사무실 TV를 바라본다. 결국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한 투표는,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및 무효 9표라는 결과가 나온다. 예상보다 높은 찬성표다. 광화문 앞을 가득 채웠던 촛불 민심을 거스를 수 없는 시기다.
사무실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찬다. 보수 정권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선도해 온 굴지의 대기업 직원들은 보수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환호한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며 숨겨왔던 정의감을 마음껏 드러낸다. 언론인을 꿈꾸다 대기업을 택한 이들이 많은 조직이기에 분위기는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다. 샤이 보수 지지자들은 여느 때처럼 조용히 업무에만 집중한다.
"점심은 이 프로 복직 기념으로 다 같이 밖에서 먹지."
복직 날 경사스러운 뉴스까지 겹치니 사무실에는 흥이 넘친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럿 팀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점심 회식을 하는 모양이다. 회사 앞 중국요리 식당에 가니 건너편에는 옆 팀 동료들이 보인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팀장은 맥주를 시키며 반주를 권한다. 정의가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양, 축배를 들며 다 같이 "짠"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