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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새 현수막이 걸렸다.
세입자 수진은 퇴근길에 낯선 현수막을 바라봤다.
"경 관리처분총회 통과 축"
10년 넘게 이어온 긴 진흙탕 싸움이 정말 끝나는 것일까. 조합원과 비대위 간의 지루한 싸움은 결국 조합의 승리로 점쳐질 것인가. 조합 내부 분열을 광고하듯 서로를 비난하던 현수막은 떼어졌고, 시공사가 '명품 아파트'를 짓겠다고 다짐하는 대형 현수막은 그대로 걸려 있다. 빠른 진행을 원하는 조합원들의 발목을 잡으며, 시공사 선정 무효를 외치며 소송을 진행하는 비대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쪽이 진 모양이다. 세입자인 수진은 비대위가 이기길 내심 바랐는데 말이다.
지난 전세 계약 갱신 때 재건축이 가까워지며 시세가 내려가 보증금에서 1억 4천만 원을 돌려받으며 낮은 금액에 살고 있는 수진은, 이 위치에서 이 금액대가 무척이나 만족스럽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수진은 최대한 이사를 미루고 싶다.
가성비 좋은 이 집에서 더 살고 싶다.
서초우성1차아파트 관리처분총회 통과 현수막 (출처 | 조선비즈)
수진은 '이번에도 미뤄지겠지? 여긴 근처 재건축 단지 중에서 제일 진행이 더딜 거랬는데, 설마 아니겠지?' 속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이번에는 '진짜' 이주해야 할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사는 3년 남짓 동안 곧 이주한다는 소문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곧 무산되곤 했다. 재건축은 이렇게 골치 아픈 건데 왜들 난리일까 안타깝게 생각한 수진이었다. 조합원 총회 시기마다 그랬다. 이번에도 부디 그러길 바랐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경비 아저씨도 섭섭해하며 '아마도 곧 이사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확인해 보라'라고 한다. 수진은 집에 오자마자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단지에 살고 있는 친구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아, 이번에는 진짜 이주하는 거야?"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진짜 이주할 가능성이 큰가 봐. 엄마도 총회 갔다 오시더니 매봉 근처로 이사할 집 알아볼까 하시더라고."
"조합이랑 비대위 소송이 길어질 거라고 하지 않았어? 결국 하긴 하는 건가...?"
"내가 정말 부동산은 관심이 없어서... 나중에 엄마한테 한번 물어볼게. 아 근데 이번 총회에서 통과되어서, 승인만 나면 바로 이주하는 거는 맞나 봐."
"고마워, 나도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나는 애 어린이집 때문에 이 블록을 못 떠날 것 같아서 걱정이야."
"맞다, 무지개아파트도 봄부터 이주한다는 것 같던데..."
"응, 그래서 전세 물량 없을 것 같아. 휴우, 몇 년 동안 먼지도 많이 날릴 텐데 여기서 애 키워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내일 부동산에 전화해 봐야겠다."
"그래그래, 좋은 집 찾을 거야!"
서초무지개아파트 관리처분계획안 승인 현수막 (사진 | 조선비즈)
2개의 대단지 이주 기간이 겹치면 전세대란은 불 보듯 뻔하다. 서초 독수리 5형제의 두 대장이 동시에 이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거주하던 조합원들과 세입자들은 근처 이주할 집을 알아봐야 한다. 수진은 마음이 급해진다. 회사 어린이집을 생각하면 근처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서초우성 1차와 무지개를 합쳐 대략 1,800세대가 동시에 이주를 하게 된다. 이미 신축이 된 서초우성 2차와 3차는 제외하면 신동아아파트만 남는다. 한 발 앞서 집을 알아보고 빨리 잡아야 한다.
제발 이번에도 가성비 좋은 집을 만날 수 있기를.
수진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2
토요일 오전, 수진은 길 건너 부동산에 들렀다.
"소장님, 신동아 전세 아직 안 올랐죠?"
"아휴, 벌써 올랐지. 이제 만기 되는 사람들 벌써 이사 가고 있어요. 무지개는 벌써 확정이잖아."
"벌써요? 아... 저도 우성 이주 확정되면 바로 신동아로 가야 하는데, 오늘 볼 수 있는 집 있을까요?"
"잠깐만, 애기 엄마 혹시 오성 다녀?"
"네, 그렇긴 한데 왜요?"
"아 그럼 전세 가지 말고 집을 사. 신동아 6억 8천짜리 급매 있어."
"남편이 평생 전세 살자고 해서 집 못 사요."
"에휴, 이거 진짜 좋은 기횐데."
"괜찮아요, 저흰 계속 전세 살 거라서요."
지난 하락장에 부동산 반토막을 겪었던 남편 한결은 부동산 하락론자다. 경기도 본가의 집이 반토막이 난 후 그 자리에서 몇 년이나 지속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둘은 평생 전세로 살자 다짐하고 신혼집도 전세만 구하러 다녔다. 남편이 결혼하며 가져온 교대역 앞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월세만큼의 월세 또는 전세이자만 낼 수 있는 집만 골라 봤다. 이율이 높은 저축은행의 통장을 모으는 재미로 살고 있었기에 알뜰살뜰한 이 체제를 거스르기도 쉽지 않았다. 예금자보호법을 받을 수 있는 5천만 원까지만 넣은 통장이 그래도 벌써 네 개 째다. 대기업 맞벌이로 돈을 모으니 이렇게 차곡차곡 모아지는데 굳이 머리 아프게 부동산 투자를 하며 리스크를 안고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 한 결과 수진이었다.
서초신동아1차아파트 (사진 | 조선비즈)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이주가 확정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음이 급해진 수진은 주변 상가 모든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단독 물건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며 발품을 팔았다. 결국 무지개상가 어느 부동산에서 급 전세 물건을 만날 수 있었다. 1층이었고, 대출이 있어 후순위 전세 조건이라 저렴한 집이었다. 남편 한결도 동의했다. 시세 10억 정도 집에 3억 대출이 선순위, 수진이 3억 1천으로 전세를 들어가면 경매에 넘어가도 위험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집들은 3억 후반 대인데 3억 초반이면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현금 1억 9천이 있으니 전세 대출도 조금만 받으면 되고, 시세 3억짜리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월세 100만 원은 생활비에 보태면 되니 합리적 선택인 셈이다.
그렇게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선순위 대출이 있는 집을 한결의 어머니는 못마땅해했다. 한결과 수진은 시세보다 많이 저렴한 조건이라며 설득해야 했다. 계약서를 쓰는 자리에는 어른이 한 명 있어야 혹시 모를 속임수에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어머니와 동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유치원 운영 때문에 대출을 조금 받았었는데요, 지금 이렇게 잡지에도 소개되고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머 유치원 건물이 너무 예쁘네요."
집주인이 대출을 낀 이유를 설명하자 수진은 친절히 대답해준다. 하지만 수진의 시어머니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아니, 일부러 드러낸다.
"제가 건축을 전공해서 직접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아니 됐어요. 그런 거 안 보여주셔도 돼요."
"어머니, 그래도 한번 보세요."
"됐어, 본 걸로 해."
기싸움에서는 한결의 어머니가 승리했다.
하지만 선순위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럼 3억 9천 시세대로 받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집값이 갑자기 떨어지거나 집주인의 사업에 위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3
이사 날이 다가왔다. 원래 살고 있던 서초우성 아파트는 1년 전 계약을 갱신하면서 이주가 시작되면 언제든 이사한다는 조건으로 연장했기 때문에 원하면 일찍 나올 수 있었다. 늦게 이사 나오면 깜깜한 밤에 변기라도 뜯어가려는 도둑들이 많이 돈다는 소문에 일찍 이사를 나오고 싶었다. 수진은 1월 말로 날짜를 잡았다.
곧 수진이 이사할 신동아아파트 집에는 오성물산 직원 부부가 초등학생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낡고 좁은 집이어도 수납 테트리스 실력이 돋보이는 세입자였다. 7년간 그 집에 살았던 부부는 바로 옆단지 서초에스티지로 입주하느라 이사를 나간다고 했다. 수진은 새집으로 가는 그 가족들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언젠가 아이가 초등학생 즈음 되면 나도 저런 아파트에 살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품어봤다.
33평에서 29평으로 이사하는데도 많은 짐을 정리해야 했다. 남편이 어려서부터 쓴 책상도 둘 곳이 없었다. 4평 차이가 이렇게 큰 것임을 실감했다. 복도 쪽에 있는 방 2개는 외풍이 심해 이번 집에서도 많이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나는 붙박이장을 넣는 옷방으로, 다른 하나는 책장과 책상 하나로 꽉 채웠다. 그래도 집이 가득가득한 느낌이었다. 정리해도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녹물 필터도 풀세트로 장만했다. 샤워기뿐만 아니라, 세탁기, 세면대까지 모두 설치했다. 아들이 몸을 긁을 때마다 낡은 아파트에 살아서인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첫 재건축아파트 신혼집에서는 아기가 없는 상태로 이사를 들어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조금씩 고쳐가며 살았다. 체리색 싱크대장은 셀프로 시트지를 붙여 흰색으로 바꾸고, 파란색 타일이 보기 싫었던 화장실에는 화이트 벽돌 모양의 폼블록을 붙이고 살았다. 어차피 곧 철거할 집이니 마음대로 뜯고 붙이고 꾸미며 살 수 있었다. 아무리 고쳐도 낡은 느낌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밝고 깨끗한 집을 만들고 싶었다.
일주일에 걸쳐 이삿짐을 정리했다. 정리를 끝내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수진이 전세 시세가 어느 정도 올랐을지, 자기보다 비싸게 집을 구하고 있을 게으른 경쟁자들을 생각하며 미소 띤 얼굴로 부동산 어플을 켰다. 그런데 중요한 건 전세 시세가 아니었다. 이 집 매매 시세가 13억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분명 전세 계약을 하던 지난달에는 10억이었던 시세가 어떻게 한 달 만에 3억이나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집주인은 3억 대출을 끼고 산 이 집으로 한 달 만에 3억을 벌었다니, 수진은 그날부터 부동산 어플로 시세를 매일 조회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재건축이란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진은 헌 집 주고 새집 받는 재건축 아파트는 승인 단계마다 계단식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세살이만 하다가 집값이 올라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수진은 본인이 경험한 재건축 아파트 집주인의 돈방석에 올랐다는 생각만 들었다. 생각해 보면, 서초우성 1차 아파트 집주인은 그 집을 2년 전쯤 9억에 매수했다. 집주인이 바뀌었으니 연장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왜 이런 낡은 아파트를 이런 큰돈 주고 사는 걸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새 아파트가 되면 과연 얼마가 될까? 평당 1억이라면 33억?' 이런 생각이 든다. 물론 세금과 부담금이 있겠지만, 그래도 몇 억을 벌 예전 집주인이 부러웠다. 왈칵 우울감이 몰려왔다.
지난달 신동아 6억 8천짜리 급매를 잡으라던 부동산 소장님의 말을 듣지 않은 날이 떠올랐다. 지금은 10억이 넘었을 것이다. 내 집에서 살면 이사 걱정도 필요 없을 텐데. 그 집을 누기 잡았을까? 가만있자. 그 부동산이 어디였지? 내 평생의 은인이 되셨을 텐데. 부동산 사람들 다 사기꾼이라고 믿지 말아야 한다던 어른들 말씀이 이제 바보 같은 가르침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그런 조언을 하신 분들은 그래서 부자가 안 되신 거겠지.' 이불 킥해봐야 소용없다. 일생일대의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쉬움에 포모(FOMO)가 찾아왔다. 조급해졌다.
"그날, 전세 알아보지 말고 집을 샀어야 했어!"
수진은 그렇게 재건축 아파트에 눈을 떴다.
과연 흙수저 수진은 강남 재건축 아파트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
과연 흙수저 수진은 강남 재건축 아파트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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