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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강진역 Oct 27. 2024

"40년 부동산 하면서 애 안고 우는 엄마는 처음봤어"

매도인의 계좌번호를 받아내다



1



비오는 밤길을 뚫고 다녀온 개포주공아파트. 수진의 마지노선 11억짜리 집은 매도인의 변심으로 3천만원이 올랐다. 8개월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아쉬움에, 이제 개포동은 쳐다보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자 알람음이 울렸다. 부동산 공인중개사였다.



"000-0000000-00 여기에 천만원 빨리 보내요. 매도인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요. 바로 보내야돼."





'드디어 매도인 계좌를 받았다!'



떨리는 손을 애써 차분하게 다잡으며 문자를 확인하자 바로 전화가 왔다.



"애기 엄마, 내가 40년 부동산하면서 애기 안고 우는 엄마는 처음 봤어.

그래서 내가 매도인 설득한 거야.

일요일에 비를 뚫고 애기 안고 달려  엄마다,

젊은 사람이 얼마나 간절하면 그랬겠냐,

오죽하면 처음 보는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겠냐, 하니까

그집 사모님이 마음을 돌린 거야.

이런 사람한테 팔면 복이 거라고.

돈은 다른 데서 벌거라고 내가 사정사정해서 받아낸 거야.

지금 남편분이 해외 출장 중이라 연락이 안되고 있어.

기다려 달라는데 내가 사정을 했어.

거기 사장님 아시면 난리 거야.

지금 하늘이 도운 거니까 빨리 입금해야 돼요.

그집 사모님 마음 바뀔지도 몰라. 빨리 일단 보내. 알았지?"



"아 감사해요 소장님, 남편 통장에서 보내야 해서 지금 바로 이야기하고 보내드릴게요."

"진짜 급한 거야. 이 가격에 절대 못사는 분위기인 거 알잖아. 빨리 설득해요."

"네 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집에 거의 다 왔는데, 비를 맞아서 아이 씻기고 눕히고 바로 연락 드릴게요. 딱 1시간만 주세요."

"하, 알았어요, 딱 1시간이야. 그 시간 지나서는 효력 없어질지 몰라. 빨리 연락줘요."




문자를 받고 수진이 통화를 하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연예인 전화번호보다 따기 힘들다는 매도자의 계좌번호를 문자로 받고, 아이를 씻긴다는 핑계로 1시간을 확보했다.



수진은 그 사이 압구정 토박이 조리원 동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내가 진짜로 강남에 아파트를 살까 하는 순간인데, 그래도 가계약금 보내기 전에 언니 얘기 듣고 해야 안심이 될 거 같아서."

"어, 수진씨 잘했어. 전화 잘했어."

"이거 너무 가격이 올랐는데, 괜찮을지 몰라서, 괜찮을까 언니?"

"내 친구가, 타워팰리스 10억 한다고 주변에서 미쳤다고 했을 때 타팰을 샀거든. 근데 걔가 제일 빨리 부자되더라고. 내 주변 보니까 결국 집 산 사람들이 부자됐어."



수진은 주변에서 가장 부자이자 부자 친구들이 많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토박이이면서도 수수하고 솔직한 스타일에 금방 친해진 조리원 동기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받으니 마음이 놓였다. 전화로 매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한결을 설득해 가계약금을 송금했다.



드라마 같은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됐다.





2



본계약 날짜는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 그날 수진은 오전 반차를 내기로 했다.



가계약금을 송금하자마자 일주일 동안 호가는 2억이 올랐다. 혹시라도 계약이 파기될까 조마조마한 날들이 이어졌다.



계약 날, 이미 오른 시세 때문에 매도인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당연했다. 다행히도 매도인은 젊은 아기 엄마의 간절함을 이해한다며 계약을 무효화하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수진은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계약 파기하실까봐 계속 잠이 안 왔어요."

"어휴, 나는 잘 잤겠어? 내가 더 못 잤지. 우리 남편이 아직도 파기하자고 그래.

아니 무슨 30대 젊은 사람이 벌써 강남에 집을 사려고 그래?"



매도인의 말이 뾰족하게 수진의 마음에 날아와 꽂힌다. 분위기를 애써 바꿔보려는 공인중개사도 한마디 거든다.

"아유, 사모님 다른 데서 돈 더 벌거야. 복 받으실 거야."



공인중개사가 나서서 매도인을 달랜다.



눈치는 보였지만, 계약이 진행되는 만큼 수진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리고 잘 샀다는 확신이 들었다.

매도인이 화를 내면, 매수인이 잘 산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부동산을 나오고 난 후에야 수진은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지었다. 매도인 앞에서는 차마 웃지 못한 수진이었다. 인주가 마르지도 않은 계약서를 들고 개포동 한바퀴를 돌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절대 갖지 못할 것 같았던 강남 땅 한 칸을 갖게 되다니, 수진은 꿈만 같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 들면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여기서 자만하지 않고 더 열심히 대출을 갚으며 아이와 남편과 행복한 일상을 보낼 상상을 하며 걸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모습,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 대학생이 된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곳이 신축 아파트로 변했을 때 대모산자락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있을 세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속에는 행복함이 가득 차올랐다.



개포동 한바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고 나니 어느덧 점심 시간 끝날 무렵이 됐다.




3



서둘러 현실로 복귀한 수진은 다시 업무를 챙겼다. 몸은 사무실에, 마음은 개포에 있었다. 메신저로 선배에게 살짝 이야기를 건넸다.



"선배님 저 오늘 계약서 쓰고 왔어요."

"오! 금액 안 올리고 그대로?"

"네네, 일주일 사이에 2억이 올라서... 진짜 눈치 보였어요."

"와 너무 다행이다! 너무 축하해!!"

"선배님 감사해요. 제가 이번 주에 점심 살게요."

"아니야, 이럴 때일 수록 더 조심하고 더 아껴. 이제 대출 생겨서 월급은 줄어든 느낌일 거야. 밥은 내가 살게."

"흑흑...감사합니다."



선배의 축하를 받으니 이제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강남 집주인이 된 걸까?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아니야, 개포동은 강남에서도 끝자락, 예전엔 '개도 포기한 동네'라며 무시당하던 동네라고 했어. 설레발치지 말고 차분하자. 그리고 재건축은 인생에 한 번만 겪어도 늙는다는데 얼마나 고생일지 몰라. 조심해야 돼.'



수진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며 지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민족인데, 하물며 후배가 샀다고 하면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집 이야기는 서초강남에 등기를 친 선배랑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부러 나누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점점 그게 마음이 편해져서 같은 동네에 집을 가진 사람들과 집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어느새 회사에는 수진이 집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진 프로, 혹시 커피 마실 시간 있어? 나 부동산 좀 물어보고 싶어서..."

"프로님, 개포에 집 사신 거예요? 와 얼마에 사셨어요?"



수진의 예상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점점 부동산에 대해 수진에게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친하지 않던 선배들도 가끔 커피 한잔 하자며 말을 걸어왔다. 특히 30대 워킹맘 선배들이 그랬다. 이제 막 부동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 부동산을 산 것밖에 없는 수진은 부끄러우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유, 선배님 저도 잘 모르는데, 어떤 부분이요? 제가 도움드릴 수 있다면 다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저도 잘 몰라서..."



부동산은 결단을 내린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전문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조심해야하는 건 알지만, 그간 모은 자료들을 하드에서 썩히느니 도움될 사람에게 나누고 싶은 오지랖도 컸다.



집을 사니 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수진의 마음도 달라졌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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