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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Sep 28. 2024

알을 깨고 나오다

머스트의 삶을 버리다

세 살이 채 안된 아이는 방실방실 웃고 있다.

아빠는 "폴짝 뛰어봐 율아" 동영상을 찍으며 주문을 하고 아이는 아주 조금 뛰는 척하다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아직 몇 마디 못하는 그 아이는 혀 짧은 발음과 단어만으로 대답한다.

"아야~ 아파 아파"

"다시 한번 뛰어봐~"

"목욕해, 목욕해"

16개월이 되도록 걷을 생각을 하지 않던 율이는 어느 날 문득 결심한 듯 뚜벅뚜벅 걸었었다. 하지만 뛰거나 작은 경사를 오르는 것과 같은 딴에 위험하다 싶은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 역시 그랬었나 보다.


우연히 아이와 지난 동영상을 보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참 난 옛날부터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했어."

나는 마냥 귀여운 동영상으로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 동영상에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마음을  캐치했다.

"그래서 난 공부를 하기 싫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좋아한다고 세뇌시키면서 살았던 거 같아. 어떤 도전을 할 때도 좋아서 했다기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도전을 안 하면 데미지가 더 크다고 여겨서 경험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 했던 거 같아."

"어머 그래? 난 네가 좋아해서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어?"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남들만큼 하면 내가 원하는 어떤 이상적인 지점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 내 마음이 그렇다고 믿도록 계속 단련했지. 그게 사춘기가 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되어서 스스로  모델링한 삶을 살았어. 학문도 남들이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 그렇게 세뇌를 하다 보니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던 거 같아. 중고등학교 때는 내가 내가 아니고 이성의 지배하에 나를 연기한 거야. 가면을 쓰고 살았던 거지."

몰랐다. 물리도 수학도 학문도 정말 좋아서 하는 줄 알았는데.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주문을 걸면서 매진해 왔다는 사실을.


"남들은 사춘기 때 자아를 찾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마음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해서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넌 어떻게 하다가 그것과 완전 극단적으로 다른 곳으로 간 거야?"

"공부를 잘하면 다들 좋아하고 나도 기분이 좋은 것도 있었지. 하다 보니 결과도 좋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위인전에 나온 사람들처럼 절제와 탐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 거기에 영재고를 준비하고 가면서 환경적인 요인까지 그런 상태를 강화시켰던 거야"

"네가 올해 초부터 계속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긴 했었지 그래.. 작년에는 어떤 과를 가야 할지 일 년 내내 고민하더니만 올핸 이 부분이 화두인가 봐"

"그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어. 하도 나를 속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과를 정할 수가 없었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때 엄마를 위한 프로그램을 밤새 짜주면서 아 이건 내가 밤새 짜도 좋아하는 일이구나 생각해서 컴퓨터로 정하게 된 거야. 직접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았거든. 물리도 한번 그렇게 해봤는데 그만큼 좋지는 않더라고."

작년 여름 내 작업을 도와준다고 한글프로그램의 수식 처리를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접근하는 프로그램을 밤새워서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한참 입시 준비를 해야 할 시가에 안 하고 뭐 하지 싶었더니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엄마가 그래서 맨날 좀 편하게 살라고 해도 넌 그럴 수 없다고 했었잖아."

"그 말이 뭔지는 이젠 알겠어. 하지만 이런 고민을 통해서 변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로만 듣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아. 이전처럼 사는 게 더 이상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젠 정리가 되었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된 거겠지. 알을 깨고 나왔다고나 할까"

"앞으로 엄마가 조금이라도 너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할게. 너는 예전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유념하는 스타일이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을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예전에 그랬던 거 아무래도 먼저 많이 살아본 사람들이니 나보다 판단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배제하지 않았던 거지."

"엄마도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야. 안 그래도 요즘 엄마는 육아졸업을 하는 중이야. 너의 판단과 삶을 존중하고 나도 새로운 중요한 것들을 찾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여다봐야지 하고 있었거든. 서로 독립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가 같은 궤를 가진 생각인 거 같은데."

"그러게. 옛날부터 책에서 배웠던 때가 오니 생각한 것과 다르긴 하다. 난 미래의 경험을 계속 시뮬레이션하면서 상상하면 실제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아. 지금이 그래.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는데 생각과 많이 달라. 계속 그동안 생각했던 게 이젠 명확하게 되었으니 엄마한테 이야기해 주고 공감과 이해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이를 놓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동안 아이 역시 자신을 들여다보고  혼자 제대로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여 공들여 고민했구나.

남편은 장난으로 나에게 아들박사라고 했다.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감정을 모두 헤아릴 수 있고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관심과 애정으로 갈고닦은 그 박사과정 반납해야겠다. 진짜 좋아하는 것으로 믿도록 하는데 나는 일조하지 않았을까. 본인이 만든 틀 안에서 스스로를 갈아넣었던 아이의 시간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좀 더 발산하고 스스로를 무겁게 누르지 말고 살아"

"한 순간에 바뀌진 않겠지만 차차 바뀌겠지."


이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렴. 사회가 밀어붙이는 대로 나아가지 말렴. 너의 마음을 많이 돌보렴. 너의 욕망을 무시하지 말렴. 온통 해야 할 것들로 둘러싸여 살았던 과거를 그래도 애정 어리게 추억하렴. 어쩌면 이 순간의 깨달음 뒤에 또 다른 부정과 의심의 시간이 온다 해도 산다는 건 끝없이 그런 순간을 만나는 것이란 것임을 받아들이고 실망하지 말으렴...숱한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가라앉히며 바라본다.


너와 나는 각자, 함께 행복하는 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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