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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Sep 29. 2024

우리는 서로의 우주였다

지나야 보이는 것들

"누군가가 이렇게 나를 온 힘으로 좋아하고 전부로 생각하는 것은 신기하고 소중한 일이긴 한 거 같아요."


4, 5살짜리 남아를 키우는 친구는 요즘 아이 키우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이전에 물론 자꾸 신경질을 내서 걱정이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엄마로 사는 것의 기쁨을 가꾸고 있는 모습이었다. 늦은 나이에 시험관 아이로 가져서 그런 것인지 원래 성격이 긍정적이고 호들갑스럽지 않고 깊어서인지 참 좋아 보였다. 하루종일 엄마를 찾고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과연 그때 그 시절 그랬던가 생각해 보면 그렇진 않다. 그저 아이와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걷어내는데 급급했던 거 같다.


이적의 어머니로 유명한 박혜란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조급해하고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 가는 길은 낯설고 얼마나 가야 하는지 몰라서 두렵고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익숙한 길은 보다 여유 있게 산천풍경도 돌아볼 수 있기에 미리 걸어간 자의 조언은 그저 조언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 처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나도 그렇게 유난스럽게 아이의 기침에 체온계를 들고 가고 어두운 표정에 전전긍긍하면서 아이를 돌보았지."

어릴 적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고 쉽게 바이러스에 침투당해 많이도 아프다. 그러니 이런 아직 성글지 못해 약하디 약한 자신을 돌보고 바라봐주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누르면 무엇이든 나오는 자판기처럼 아이의 전부가 되어 살다 보니 아이가 나의 우주가 되었다. 세상의 바이러스를 모두 내가 막아줄 것처럼 굴어대면서 초집중을 하다 보면 그 순간을 즐기기보다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곤 했다. 하지만 별처럼 빛나던 아이와의 공감의 시간들을 지난 육아일기에서 발견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엄마였구나 싶은 안도.


2009.2

울아들 지긋지긋한 축농증 때문에 코에 매일 식염수세척을 해주고 있다.

오늘은 주사기를 들더니 잠들기 전 방 안에서 주사기놀이를 하며 엄마 아프지 않냐고 자꾸만 아프길 강요한다.

잘 시간이라고 어서 자라고 하니 여긴 큰 병원이라서 밤새 문 열어 논단다.

역시 응급실 많이 다니니 별 걸 다 알아.

그래도 자라고 하고 좀 있다 샤워하고 나오니 "큰 병원도 피곤할 땐 잠자요" 라며 다소곳이 누워서 이불을 덮는다. 귀여운 놈.


2009.5

어린이날이라고 뭐 갖고 싶냐고 하자

율이 왈.

엄마가 사주는 거면 뭐든 좋아요.

근데 버스나 구급차가 없는 거 같아요.

의젓하다고 해야 할까 웃긴다고 해야 할까

어린이집에 갔다 온 아들. 돌아오면서 엄마가 선물 사놨다고 하니 손에 뽀뽀하고 난리다.

집에 와서 구급차를 보고 기뻐 한 시간을 방에 처박혀 놀더라.

너무나 거대한 차가 많다고 좀 버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어차피 크면 못 가지고 놀잖아요. 한다.

이 조그만 놈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2009.9

울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축농증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안 먹였는데 불행히도 그전부터 유독 아이스크림 사랑이 유별났다. 금지된 것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절대 취향도 존재하는 듯

어쨌든

어젠 율이는 언제 가장 행복해 라고 하니

아이스크림 먹을 때란다.

요즘은 그래도 자주 먹이는데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가 보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눈물바람이다.

아침부터 마트에 가서 사 오라니 들은 척도 하지 않을 수밖에

이에 아빠가 아이스크림 잘 사주는 엄마로 바꿀까 라고 하니

갑자기 울먹울먹 하더니 내 품에 안겨서 운다.

"아빠가 엄마를 바꾼대"라고 하면서 서럽게 우는 것이 너무 웃겨서

"우리 장난치지 않는 아빠로 바꿀까"라고 했다.

장난꾸러기 엄마아빠 덕에 울 아덜 고생이다.


2010.2

여섯 살이 돼도 장염에 걸린다는 사실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어린이집에도 안 다니는데

요즘 장염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이 나이에 걸릴 줄이야.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네 집 아기가 엄청 물설사를 해대더만 그래서일까??

오래간만에 미친 듯이 토하고 괴로워서 몸부림쳤다. 물조차 다 토해내는 심각한 지경.

엄마가 걱정하고 계속 옆에 간호해 주니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세상에 있을까?"

라고 한다.

율이처럼 이쁜 아들이 세상에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2010. 3. 14. 1:18

"이모, 율이는 엄마아빠를 영 번째로 사랑해요. 율이 자신은 첫 번째예요."

"그래? 엄마아빠를 더 사랑하는구나."

"넵!"

"그럼 큰 사탕이 있으면 율이 먹을래 엄마아빠 줄래."

"율이 줄래요."

"왜? 엄마아빠를 젤 사랑하는데 율이가 가져?"

"엄마아빠는 율이를 젤루 사랑하니까 율이를 주는 거지요."

차암. 우끼는 짬뽕이다.


2010.9

살다 보면 별일도 아닌 일에 얼굴  찌푸리기 십상인데

아이들은 참 항상 밝고 신난다.

까르르 멀리서 엄마를 보면서 펄쩍 뛰는 모습

또르르 뛰어와서 소파에 몸을 내던지는 모습.

조잘조잘 별일 아닌 일을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 너무너무 이쁘다.

아이에게 항상 부족한 엄마이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이것저것 잘 못 챙겨주어 잘난 아이 못 만들어주는 엄마지만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면

그래도 내가 우리 아들 행복하게 해 주고는 있구나 싶어 마음이 놓인다.

결국 엄청나게 잘나 봤자 뭐 할까 싶기도 하고...뚜렷한 형상 없이 무작정 행복을 아는 아이를 만들어주고 싶은 나의 교육관이 현실과의 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 아이와 너무 행복하다!!!!


짜증 내고 화냈던 순간이 없었으랴만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몰랐을 행복을 선사받았구나 새삼 지난 기록을 통해 깨닫는다. 나만 바라보던 그 아이는 이제 덩치 큰 청년이 되었다. 오늘은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꼬맹이가 이야기하는데 너무 귀엽더라며 나도 저런 시기가 있었지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아이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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