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얼리 어댑터가 아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기계와 별로 안 친하다. 물론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카메라 기종이나 요즘 유행하는 촬영장비에는 관심 많지만 일상생활만큼은 구석기인과 다를 바 없다. 가방을 뒤져보면 비파형 동검이나 주먹도끼가 나올지도 모른다.
노트북은 10년 전에 산 걸 아직도 쓰고, 요즘 초딩도 들고 다니는 그 흔한 패드나 탭, 스마트 워치 같은 것도 없다. 아내는 사자고 하는데 굳이 그런 게 왜 필요하나 싶다. 전화만 되면 되지~ 마음 같아서는 종이컵에 실 묶어서 다니고 싶다.
처음부터 내가 이랬던 건 아니었다. 되레 원체 호기심이 많은지라 새로운 문물, 기기에 대한 탐구욕도 강했다. 누가 신상 제품을 가져오면 맛소금 뿌린 갯벌 맛조개마냥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변하게 된 걸까? 그건 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때는 2009년, 유난히도 더웠던 그해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BS에 입사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다. 친한 대학 후배가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혹시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괜찮은 사람?>
영화 배급사에 다니고 있는 후배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4DX 기술을 처음 선보이는데 테스트할 겸 영화 보러 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4DX? 그게 뭔데?>
<예전에는 눈과 귀로 봤다면 이제는 오감으로 영화를 체험할 수 있어요.>
오감으로 본다고? 와~ 대박!!
‘테스트’라는 게 살짝 걸렸지만 그래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영화는 전설적인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신작, <아바타>랬다. 안 그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혹여나 누가 먼저 기회를 낚아챌까 봐 나는 맹구처럼 손을 뻗고 ‘저요!! 저요!!’를 외쳤다. 아마 책상이 있었으면 버선발로 올라갔을 거다.
며칠 후 나는 4DX 영화관으로 향했다. 들어가니 안에는 날 포함해서 15명 정도가 있었다.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후훗~ 이분들과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겠군.
게다가 내 ‘프런티어' 정신을 어찌 알았는지 관계자는 제일 앞자리를 내게 안내했다. 앉으니 일반 영화관 의자랑확실히 달랐다. 뭐랄까? 엉덩이를 입체적으로 꽉 잡아주는 느낌이랄까? 가만히 있어도 케겔운동이 될 것 같았다. 감탄하고 있을 때 관계자가 앞으로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4DX 시연회에 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스스로가 뿌듯했다. 괜히 비듬도 없으면서 나는 어깨를 툭툭 털었다. 5분 정도 간단한 4DX 소개가 끝나자 우리들은 3D 안경을 나눠 받았다. 이걸 쓰니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처럼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즐거운 관람되세요. 그럼 영화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기대에 가득 차서 힘껏 박수를 쳤고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왔다. 오프닝이 시작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갑자기 진동이 느껴지면서 의자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와~ 이게 4D 아니... 5G라고 해야겠구나. 진짜 오지니까.’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영화 <아바타>는 환상적이었다. 스토리도 나쁘지 않았지만 비주얼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진짜 외계 행성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 떠 있는 산도 그리고 푸른빛이 감도는 물속 세상도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였다.
게다가 영화 분위기에 맞춰서 진동 및 특수효과가 곁들여지니 훨씬 더 영상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주인공 머리가 날리면 어디선가 나타난 바람이 좌석에 앉아있는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날렸다. 새벽 씬에는 스모그가 극장에 자욱하게 깔렸고 주인공이 화살을 쏘면 날아가는 화살촉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 대박!!”
혹시 이걸 드라마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안방에서 이렇게 감상하면 훨씬 몰입감 쩔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으니...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 행성에서 괴물에게 쫓겨 밀림을 헤치며 뛰어갈 때였다. 침을 삼키며 집중하고 있을 때... 순간 내 발목에 뭔가 이상한 게 스쳐 지나갔다. 뭐지? 깜짝 놀라서 내려다보니 좌석 아래 굵은 나일론 실 몇 가닥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수풀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나 보다!! '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썼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갈수록 강도가 세졌다.
‘앗 따거~ 뭐야! 원래 이런 건가?’
주인공이 빨리 뛰면 뛸수록 나일론 실은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사정없이 내 종아리를 내리쳤다. 아 아파!! 훈장 선생님한테 회초리 맞는 느낌이었다. 나뿐만 아니었다. 주변에 앉은 관객들 모두 괴로운 듯 몸을 비틀어댔다. 혹시... 주인공의 고통까지 입체적으로 즐기라는 건가?
문제는 다음이었다. 악당에게 쫓기던 ‘제이크 설리’는 코너에 몰리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높은 폭포에서 아래로 점프했다.
그가 강물에 풍덩 빠지자 별안간 앞 좌석에서 한 줄기 물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아아아악~~
1도 예상 못한 상태에서 물줄기는 비데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하필 그때 입을 열고 있었다) 내 입속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가르르르르~ 극장에서 가글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는데...
‘아씨~ 이게 뭐야? 엄청 찝찝해.’
순간 앞 좌석이 벨기에 오줌싸개 동상처럼 느껴졌다. 천연암반수라도 싫을 텐데 이건 어디서 나온 물인지도 모르겠고.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보아하니 수압 조절에 실패했나 보다. 그들은 황급히 달려와서 기계장치 이것저것 만졌지만 물줄기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얼굴에 ‘물광 코팅’ 한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다행히도(?) 전원은 곧 꺼졌다. 관계자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수건을 지급했고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앞에 나와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게 테스트다 보니... 한 번만 이해해주시면..”
그 사이에 전자레인지에 들어갔나! 그의 얼굴은 수분기 하나 없이 퍼석퍼석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기분 나빴는지 자리를 떴다. 나도 살짝 고민하다가 그냥 보기로 했다. 원래 '프런티어' 정신이란~ 마냥 쉬운 게 아니니까. 서부를 개척했던 카우보이들이 겪었을 풍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기술자들은 서둘러 기계를 고쳤고 그렇게 10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책임자가 앞으로 나왔다.
“자~ 이번에는 제대로 작동될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그가 영사실에 있는 직원에게 신호를 주자 ‘제이크 설리’가 수풀을 헤치고 달리는 장면부터 다시 재생되었다. 혹시 또 회초리 맞을까 봐 덜덜 떨며 다리를 오므렸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렇게 강도가 세지 않았다. 부드럽게 발목을 스치는 정도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안도하는 사이에 주인공은 폭포에서 뛰어내렸다. 풍덩~ 강물이 튀자 나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입을 가렸다. 하지만....이번에는 수압을 너무 줄였는지 물줄기는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내 사타구니 한가운데로 졸졸졸 떨어졌다. 마치 소변의 마지막 줄기처럼 말이다. 제기랄. 이게 뭐여? 곧 바지는 흥건해졌다.
정신 차리기도 전에 기계가 고장 났는지 별 씬 아닌데도 나일론 실은 정신없이 돌아가며 내 종아리를 휘갈겼다. 앞에서는 비데처럼 물을 쏘아대고 다리는 따끔따끔 엄청 아프고, 옆에서는 비명 지르고 로데오처럼 움직이는 의자 때문에 3D 안경은 벗겨져서 한쪽 눈에만 걸쳐져 있고... 정말 최악이었다. 그때 느꼈다.
‘아~ 이래서 4D구나! 3D 직업보다 더 힘들어서~'
가르르르.. 물로 가글하면서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날 결국 4DX 시사회는 상영 30분 만에 종영되었고 관객들은 다들 욕 한 사발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냥 갈 수 없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까치발을 한 채 핸드 드라이어로 축축해진 사타구니를 말리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오던 어떤 남자분이 날 발견하고 깜짝 놀라더라. 민망해서 아바타 티켓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그러자 그는 ‘와~ 그 정도예요?’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입소문이 났는지 무려 1,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아바타를 관람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한국에 오면 인간적으로 나한테 설렁탕 한 그릇 쏴야 한다! 역대 관객 1위라는 기록에 내가 어느 정도 일조했음이 분명하니까.
암튼 바로 이게 내가 기계와 거리를 두게 된 계기다. 그때의 충격 때문일까? 아직도 파란색 피부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음... 스머프를 바라보는 가가멜 심정이 조금은 이해된달까?
그래도 누가 <아바타 2> 시사회초대를 해주면 기꺼이 응하겠다. 프런티어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나 확인하고 싶으니까. 이제는 물줄기가 입에 들어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목을 축일 자신이 있다. 행여 수압이 약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내 가방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꺼내 받으면 되니까.
그런 의미로20세기 스튜디오~ 꼭 좀 부탁해요.^^
(FIN)
P.S 13년 만에 나오는 <아바타 2> 예고편을 보고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농담조로 한 번 써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