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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자 May 18. 2024

술꾼에서 러너로

술에서 도망쳐 달리기 했다. 달려서 뭐 하게?




술을 먹었는데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 술자리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 술을 보면 눈이 반짝반짝하는 사람, 신상 술을 꿰뚫고 있는 사람,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난 사람....



네 접니다저는 술을 잘 먹습니다술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술자리에 얼굴을 내밀며, 술 잘 먹기로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많이 먹을 땐 주 5~6일을 먹기도 하고,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먹기도 한 주당입니다. 대체 어쩌다 술을 잘 먹게 된 걸까요?



그건 99% 유전이었습니다술을 먹어도 멀쩡한 건, 타고나길 술을 잘 먹는 몸뚱이였던 겁니다. 부모님께서 술을 잘 드시고 술 앞에 끄떡없는 분들이었으니까요. 그 DNA를 이어받은 저는 어느새 업계 사람들 사이에 술꾼으로 불렸습니다.  



술이 거뜬하니 술자리가 잦아졌습니다술은 사람들을 모아주고, 맛있는 안주를 차려주었지요. 술과 삶은 점점 가까워져 갔습니다. 하지만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리는 게 늘 문제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술을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한 일이 생기면 술 한 잔에 털어버리자’ 하며 혼자 마시기 시작한 술은 양도 횟수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좋지요.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으휴, 이 스트레스를 풀어버려야겠다’ 라며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맥주 한 캔을 촥 따서 벌컥벌컥 마십니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깡소주를 마시고 샤워를 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퇴근 후 술은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라지만, 매일 매일 매일 스트레스받는 데 어쩌나요?



술은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시간 순삭’이었습니다. 술 먹으면 저녁 시간이 사라지고, 다음날 숙취에 집중해 일할 시간이 또 사라졌지요. 두 번째 문제점은 분리수거할 때 술병 내놓기가 부끄럽다는 거였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술로 마음을 다스리고 난 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는 겁니다. 그때 그때 화만 삭힐 뿐, 나아지는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살이 찌고 깨어난 후 기분만 더 우울해졌으니까요.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악, 다 싫어 술 먹는 스트레스 상황, 술이 찌워준 몸무게, 술이 빼앗아간 시간, 도망치고 싶어! 살도 빼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만 하면서 정작 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스스로에게 화를 냈습니다. 



무거운 몸뚱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휘적휘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한 명, 두 명, 세 명.. 그런데 갑자기 달리기를 하는 무리들이 우르르 뛰며 나를 앞질러 가는 겁니다. 하나같이 탄탄한 다리, 다부진 팔뚝, 가볍게 쥔 주먹, 땀 흘리는 이마, 묵묵히 앞으로 차고 나가는 뜀박질. 달려 나가는 모습에 묘한 경외심과 부러움이 생겼습니다. 



쑥스럽지만 100미터를 뛰어봤습니다누가 나를 보고 있진 않을까? 내 뒷모습이 우습지는 않을까? 별 걱정을 다하며 처음 뛰어봤지만, 부끄러움보다 더 심각한 건 저질 체력이었습니다. 고작 1분 뛰었는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습니다. 죽을 것처럼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뛴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거라니!



그렇게 초보러너의 달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실패하고 달리면서 점점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술과 스트레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시작한 달리기는 점점 나를 살려주고 있었습니다.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더 다양하게 소개해 볼게요 그리고 술을 줄이면서 ‘술과 나’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술꾼에서 초보러너가 되자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술을 줄여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요.술 자체가 아니라, 술로 스트레스를 날리는 기분을 좋아했던 것을요. 그냥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이면 충분하단 걸 알게 되었어요. 술 대신 달리기로 스트레스를 날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남이 술 끊으라고 해서 못 마시는 것과내가 언제든 마실 수 있지만 안 마시는 건 천지 차이입니다. 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해 나가는 자기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지요. 스트레스를 술이 아닌 방법으로 해소하고 나를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달리기라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달리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위해서 담배를 끊었다고 해요. 


“더 달리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구는
금연을 계속하기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금단현상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담배를 끊는 것은
이전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예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내가 술을 안 마신다고 말하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습니다.


“천하의 술꾼이 술을 끊어? 그 좋은 걸 왜 끊어~?”


나는 말없이 빙구처럼 웃지요. 그리고 노란색 보리차가 든 물 잔으로 건배를 합니다

모두의 달리기에 치얼스.







프롤로그

-도망친 달리기가 살리는 달리기로


1부 

-술꾼에서 러너로

-발모광꾼에서 러너로

-하비에서 러너로

-사십춘기에서 러너로


2부

-달리기 실패 계단

-뇌를 속이는 달리기

-달리기는 역시 템빨

-달친들의 뼈있는 멘트


에필로그

지긋지긋하다면 길 위로 도망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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