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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자 Jun 02. 2024

하비에서 러너로

평생 하비족으로 살다가 달렸다. 달려서 뭐하게?



거울을 보고 똑바로 섰을 때 허벅지 사이가 붙는 분? 네, 저는 쫙 붙습니다다리가 어찌나 통통한지요. 허벅지 다리 사이가 평생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요. 다리가 날씬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허벅지 사이가 떨어져보는게 소원인 사람이에요.



저는 하체비만입니다일명 하비족이죠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은 하체 튼튼 가족이었습니다부모님 동생들 모두 어찌나 튼실한 하체를 가졌는지, 멀리서 봐도 우리 가족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죠. 아무리 살을 빼도 절대로 빠지지 않는 하체, 다이어트한다고 식사량을 줄이면 꼭 상체만 빠지고, 다리는 죽어도 빠지지 않는 이상한 체형이었습니다.



살면서 반바지를 입어본 게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중고등학교 때 교복도 억지로 입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치마나 반바지는 선뜻 입지 않았습니다. 겨우 발목이 나오는 긴치마로 타협하지만, 예쁜 치마를 입고 몸매를 뽐내는 여성들을 보면 그저 부러워할 뿐이었지요. 이 몹쓸 하비 체형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하비의 비애는 또 있습니다바지가 허벅지에 비해 허리 사이즈는 남아돈다는 것입니다. 바지를 살 때 치수를 다리에 맞추면 허리는 주먹 2개가 들어가고도 남았습니다. 심각한 상체 하체 불균형에 슬퍼하는 하비. 예쁜 스커트와 반바지는 그저 꿈에 불과했습니다. 다리 앞살 옆살 모두 어찌나 토실했는지 무릎 옆에 손잡이가 달린 것처럼 오동통했으니 말입니다.  



하비는 혈액순환도 문제였습니다제 통통 다리는 오래 앉아 있으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습니다겨울이 되면 발이 시려서 꼼짝도 못 하는 수족냉증이기도 했고요. 단순히 예쁜 반바지를 못 입는 정도의 불편함에 그치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잠을 자다가 갑자기 다리에 엄청난 쥐가 난 겁니다악!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 마구 다리를 주무르고 두드렸습니다. 겨우 쥐를 풀었지만 잠이 다 깨버렸지요. 그다음 날, 또 다음 날도 밤마다 다리 쥐는 불청객처럼 찾아왔습니다. 통통 다리를 마비시키고 밤잠을 깨웠습니다.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았습니다앉아 있는 직업 때문에 혈액순환이 안 되고붓기가 살이 된 경우라고 했습니다운동을 처방받았죠. 사십 평생 운동이라고는 털끝만큼도 하지 않은 순수혈통 눕순이인 저에게요. 하지만 운동은 피할 수 없었죠. 통통 다리라도 붙어 있는 게 좋고, 제대로 잠은 자야 하니까요. 




타고나길 하비로 태어났다고 체념하고 있을게 아니었어요하비로 인해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자신감이 내려가고 건강까지 나빠지니까요. 하비는 어쩔 수 없는 유전이라는 생각, 하비는 내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 포기하는 그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결국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거리로 나갔습니다한번 ‘뛰어볼까?’라는 기특한 생각을 했어요한번 팟! 하고 뛰어봤습니다. 1분 정도 뛰었을까요? 너무 숨차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기분, 누가 코와 입을 막은 것처럼 답답한 기분.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초보의 달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시작한 달리기생전 없던 달리기 습관을 들이기 위해 아주 단순한 것부터 시작했지요


첫째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운동복을 둔다입니다퇴근하고 집에 가면 일상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때 일상복은 아주 꺼내기 힘든 곳에 넣어두고, 운동복은 침대 바로 위에 고이 접어 가장 손이 가기 쉬운 곳에 두는 겁니다. 달리기 하기 싫은 마음에 운동복을 입혀버리는 거지요.



둘째, ‘화이트보드를 방안에 걸어둔다입니다. 다이소 화이트보드를 사서 운동한 날에 동그라미를 칩니다. 이때 중요한 건 나는 아주 기가 막힌 초보자이기 때문에 처음에 단 10분을 뛰어도 운동 동그라미를 칩니다. 운동에 습관을 들이고 그다음에 양을 늘려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셋째, ‘달리기 양을 점점 늘려 운동한 자신을 칭찬해 준다’입니다. 매일 운동 갈 때 사진을 찍고, 어제보다 나아진 자신을 확인합니다. 폭풍 칭찬은 자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자신을 칭찬해 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더 생기니까요. 그렇게 했더니 오래도록 달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친동생과 이야기 나누다가 보니, 동생도 진심으로 하비를 고치기 위해 꽤 달리기를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두 다리는 튼튼하면 되었지, 이 모양새는 각자 살아가면서 달리기로 내 다리 내가 가꾸면 되는 거였습니다. 나는 하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를 선택했습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비에서 러너로도망칠 수 있을까요그렇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토실한 다리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하비족이었으니 단박에 좋아질 순 없겠지요. 하지만 ‘달려서 뭐하게?'라고 묻던 가족들이 점점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 우리 집안 다리가 아니잖아!? 다리살 어디갔어?”라고요.


‘달리면 달라진다’라는 문장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도 하비는 달려갑니다.





프롤로그

-도망친 달리기가 살리는 달리기로


1부 

-술꾼에서 러너로

-발모광에서 러너로

-하비에서 러너로

-중2병맘에서 러너로

-사십춘기에서 러너로


2부

-달리기 실패 계단

-뇌를 속이는 달리기

-달리기는 역시 템빨

-달친들의 뼈있는 멘트


에필로그

지긋지긋하다면 길 위로 도망치자




https://brunch.co.kr/@folsy/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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