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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자 Jun 08. 2024

중2병맘에서 러너로

폭풍 반항하는 꼴 보기 싫어 달렸다. 달려서 뭐 하게?



저는 유산 후 어렵게 얻은 딸아이를 키우는, 야근 많은 회사의 워킹맘 16년 차입니다.” 이 한 문장에 온갖 희로애락과 고생 범벅이 들어있어요. 이 험한 세상, 어쩌자고 애를 낳은 것일까요? 야근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요! 회사 다니며 아이 키운다고 일에 소홀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동동거렸지요.



야근하는 날은 사무실 옆자리에 돗자리를 깔아 두고 색종이와 핸드폰을 쥐어주며 밤 11시 넘게 아이를 앉혀두었죠. 낮에 아이를 봐주시는 부모님께 밤까지 아이를 맡길 순 없으니까요. 집에 가자고 아이가 보채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일을 들고 와 방문을 잠그고 일을 했어요 아이가 방에 못 들어와 울면서 문을 두드리면, 겨우 재우고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고요



워킹맘이니까 낮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퇴근하면 온몸으로 놀아주고 과하게 엄마표 책육아도 했지요. 태교도 육아도 책으로 하면 좋다는 말에 닥치는 대로 책을 사 눈만 마주치면 책을 읽어줬어요. 동화책 하루 10권 읽어주기 목표 같은 걸 세워 지키려고 애를 썼죠 그럼 똑똑한 아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무모한 욕심도 있었고요.



늦게 들어온 날은 그냥 자거나 쉴 법도 한데 말이죠. 회사에서 회식을 하느라 술을 걸치고 퇴근한 날에도 아이와 놀아주고 책을 읽어줬어요. 내가 정한 룰을 지켜야 하고, 내가 낳은 아이 잘 키워야 하며, 어쨌든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 육아, 모든 것이 나를 탈탈 털어가는 것 같았죠. 팍팍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아이가 어려 도망칠 수도 없었지요




어느새 아이가 중2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활짝 피어났죠. 덩치도, 여드름도, 성질머리도요! 왕성한 호르몬과 세포생성 활동은 아이를 꽃처럼 피어나게 만들었어요 아이가 이렇게 생생하게 어른 비슷하게 자라나다니, 신기했어요. 사춘기 짜증까지도 무럭무럭 자라났다는 게 함정이지만요



2가 되자 제일 먼저 바뀐 건 태도와 눈빛 표정이었어요. 엄마가 불러도 들은 체 만 체했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엄마가 말하면 시큰둥하게 못 들은 척했지요.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했어요. 101번 잔소리를 해야지만 겨우 느릿느릿 움직였고요. 친구 생일엔 정성스러운 편지와 선물은 준비하지만 아빠 생일은 웃음과 포옹으로 때웠고요. 아 귀찮아!라는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무언가 자꾸 숨겼습니다. 책가방과 핸드폰을 보는 건 금지고요. 옷장도 못 열어 보게 하고 책상 근처에 가는 것도 싫어했어요. 게다가 자꾸 엄마 화장품이 자꾸 사라졌어요. 외모에 관심 폭발하고, 사랑이 뭐냐고 물어봐요.


핸드폰 좀 그만하고 숙제 좀 해”라고 말하면, 어느새 엄마를 삐딱하게 쳐다봅니다. “너 엄마를 왜 그렇게 쳐다봐?” 엄마도 눈에 힘을 주고 말하면 아이는 반항기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뭐? 어떻게 쳐다보길 원하는데?” 하.. 이것을 중2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내가 잘못 키운 걸까요? 엄마 맘에는 천불이 납니다.




다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었어요. 제멋대로 삐딱한 아이로부터 도망치고요. 잘 키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나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어요.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아이를 보며 ‘너 맘대로 해!’ 하면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와 버렸어요.


무작정 뛰쳐나가 뻥 뚫린 바다와 하늘을 향해 달렸어요. 집 근처에 광안리 바닷가가 있거든요. 화려한 밤바다 해변가를 뛰면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 들어요. 광안대교 불빛과 화려한 해변거리, 아련한 보름달이 달무리를 이루는 풍경을 바라보며 뛰는 거지요.


뛸 때마다 광안리의 불빛들이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물결 위로 반짝이며 흔들리고요. 광안대교 아래 모여 있는 요트 갑판 위에서 팡팡 불꽃놀이를 하는 걸 보며 달리면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 들어요.



달리기 반환점을 돌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차례에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반환점을 지나쳐 조금 더 뛰어갑니다. 왠지 모르게 진짜 도망치는 기분입니다. 묘한 짜릿함이 있어요. ‘나 진짜 도망쳐 버릴까보다’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달리기를 했습니다. 결국 몸은 반환점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지만요.

     


조금씩 반환점을 늘리면서달리는 거리를 늘려갔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그러려니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고 있구나. 나 혼자 속 끓일 이유가 없잖아.“ 달리면서 걱정을 길거리에 뿌렸어요. 오래 달리다보니 숨이 차서 아무 생각이 안났어요.



어느새 달리기 전과 달리기 후에 마음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지요. 호르몬 폭풍이 분다는 중2병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중2면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호르몬이 시키는 거겠지.’ 아이를 인정하니까 달리면서도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달리기로 힘을 빼고 난 뒤, 아이에게 잔소리 대신 그냥 대화를 했습니다. 가시 돋은 엄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어요. 달리기를 하러 가지 않고 아이 옆에서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엄마 운동 갔다 올게’ 하고 밖에 나가 달리는 게 서로에게 더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또 아이에게서 도망쳐 달려 나가려고 할 때, “엄마 또 운동가? 가지마라고 해요. 여전히 엄마 손과 엄마 품을 바라는 아이. 


그래? 엄마랑 같이 걷기운동 갈래?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말하면 주섬주섬 따라나서는 중2딸. 아이와 같이 나가서 광안리 한 바퀴 걷기 운동을 하고 예쁜 커피숍에 가서 맛있는 스무디를 한 잔 하고 왔어요.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그래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스트레스에 집중하기보다, 긴 인생을 바라보자고 다짐합니다. 되도록 멀리 풍경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일 거라고요. 왜 아이를 키우나, 왜 회사를 다니나,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겠지만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상대를 존중해 주면서 같이 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도망쳐 달리면서 얻은 생각들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기로 합니다.



네, 말도 안 되지만, 언젠간 아이와 같이 달리기를 할 날을 상상하면서요.

“엄마 달리기 하러 가? 나도 같이 가!”





프롤로그

-도망친 달리기가 살리는 달리기로


1부

-술꾼에서 러너로

-발모광에서 러너로

-하비에서 러너로

-중2병맘에서 러너로

-사십춘기에서 러너로


2부

-달리기 실패 계단

-뇌를 속이는 달리기

-달리기는 역시 템빨

-달친들의 뼈있는 멘트


에필로그

지긋지긋하다면 길 위로 도망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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