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다 때려 채우고 달렸다. 달려서 뭐하게?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무시무시할 정도로 먹성이 좋아졌어요. 엄마 먹을 거 없어? 부엌을 들락거리고,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어요. 어찌나 먹는 걸 찾아대는지, 늘 배가 고프고 맛있는 거 없냐고 묻습니다.
문제는 먹성 좋은 사춘기 아이를 둔 엄마가 요리꽝이라는 겁니다. 주부 18년 차이지만 저는 기본적인 요리밖에 할 줄 모릅니다. 시판 양념에 기댄 두부 된장찌개, 아이 칼슘 보충용 멸치볶음, 친정 엄마표 김치 고기볶음, 어린이 입맛을 고려한 소시지 채소볶음, 샐러드를 항상 준비해 놓고요. 잡곡밥을 해서 냉장고에 두면, 아이가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엄마가 시간을 투자해 만든 요리가 중2 압맛에는 별로라는 겁니다. 탕탕탕후루만 좋아하고 마라탕에 햄버거 같은 자극적인 외식요리만 좋아하는 중2. 엄마의 집밥 아닌 집밥 같은 ‘생존 집밥 요리’에 아이는 늘 시큰둥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워킹맘에게 요리는 또 하나의 업무라는 겁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허둥지둥 장을 보고, 요리 몇 가지를 하다 보면 저녁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죠. 가족이 먹고살아야 하니까, 꼭 해야 하는 요리. 하지만 ‘끝나지 않은 할 일’ 같은 네버엔딩 프로젝트.
냉장고 안에 밥과 국과 반찬이 있는데, 아이는 편의점 삼각 김밥을 사 먹었습니다. 라면을 끓이거나 과자를 사 왔습니다. 엄마가 만든 반찬에는 불닭 소스를 뿌려 먹었습니다. 비빔면 소스나 마요네즈를 뿌려 먹었습니다. 중2의 자극적이고 이상한 식사, 가족의 건강을 추구하는 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더니 엄마가 식사를 차려 주셔서 먹고 온 아이. ‘그 집 엄마는 요리 잘하더라. 와 진짜 맛있어.’라고 했어요. 마치 아이가 ‘엄마 밥은 좀....’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 나도 유치하게 중2에게 말하고 싶었죠 ‘그 집에 가서 살아. 나도 밥 하기 싫거든!’
팍팍한 집안일에서 도망치는 방법, 눈에 안 보이게 할 것. 집 밖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갑니다. 무조건 집 반대방향으로요 발 끝에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길 위를 뛰어갑니다. 달려갈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도망쳐버리고 싶었거든요. 지긋지긋한 일상이 눈앞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냅다 달려갔습니다.
길 위에서 달리면 좋은 점은 ‘달리는 나를 잡아 세우고 말을 걸거나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저 내가 정한 길 따라, 내가 원하는 속도로 뛰어가면 됩니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갈 필요 없습니다. 원치 않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지요.
만약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오면, ‘수신거부’를 당당히 누릅니다. 달리는 중에 나를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과 차단하고 오롯이 ‘나와 달리기만 존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힘껏 도망치는 중이고요. 나는 지금 나와 달리는 중이거든요’라는 생각으로요.
달리는 동안 너무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조금만 더 뛰어보자고 나를 달랩니다. 내 숨 내가 고르면 되고, 내 속도는 내가 조절하면 됩니다. 반대로 타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나뿐임을. 아이를 포함해 남을 인정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걸요.
달리기를 하고 난 뒤부터 나에게 좀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한 요리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한 요리도 준비하자고 생각합니다. 또 왜 아이를 낳았나 생각합니다. ‘엄마는 엄마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너를 낳았어. 너뿐만 아니라 나도 중요해.’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샐러드를 맛있게 먹으려고 스페인 왕실에서 먹었다는 고급 올리브유를 샀습니다. 청사과 향이 나는 맛있는 올리브유를 아껴가며 샐러드에 뿌려 먹었더니, 어느 날 아이도 올리브유가 맛있다며 샐러드를 먹겠다네요?
또 아이의 취향과 입맛을 존중해 주기로 했습니다. 아이에게 ‘뭘 좀 준비할까?’라고 묻습니다. 의외로 아이는 ‘고기를 사다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구워 먹겠다’고 합니다. 재료만 사놓으면 스스로 먹겠다니 땡큐 아닙니까?
반찬을 사 먹는 것에 대한 묘한 죄책감도 들었는데, 반찬가게 반찬은 세상 편하고 맛있었습니다. 과거에 아이가 어렸을 때 양가 부모님께서 만들어주신 반찬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반찬가게는 내 시간을 아껴주고, 부모님의 에너지를 아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생의 가파른 계단 하나를
가까스로 오르고 나서,
조금쯤은 트인 장소로 나온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헤쳐 나온 이상
앞으로는 어떻게든지
잘 되어갈 것 같은 자신도 생겼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나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달리기를 합니다. 어떤 일이 괴로울까 생각해 봅니다. 그 일로부터 도망칠 순 없을까 꾀를 내어 봅니다. 하지만 아예 도망칠 수 없다면 한정판으로 달려요. 잠시만이라도 두 발에 스프링을 단 것처럼 가볍게 달려보는 거지요 달리고 왔다고 하면 나를 귀찮게 하던 것들도 ‘아 운동하고 왔구나 ’하며 나를 내버려 두는 효과가 있었으니까요.
시간을 아껴 달리기를 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삶을 좀 더 유연하게 사는 방법을 찾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배려할수록 남을 존중하고 함께 잘 사는 법도 배우게 되더라고요.
자, 오늘도 잘 살기 위해 달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