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취광이 광고인] 서문
나는 부산에 있는 영도라는 섬에서 자랐다. 섬이라고 해도, 초등학교만 대충 10개가 넘었고 숨바꼭질, 딱지치기, 구슬치기, 포켓몬 스티커 모으기, 벌 잡기, 연 날리기 등 우리 동네에는 놀 것도 많았고 같이 놀 친구들도 많았다.
초등학교 수련회로 경주에 다녀왔고, 불교를 싫어하게 됐다. 학교에선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했다. 나는 숨바꼭질을 자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술레가 '열'을 세는 동안, 재빨리 오락실로 달려가 철권 태그를 했었다. 둘 다 동시에 즐기자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마 그때부터, 좋아하는 거라면 성이 풀릴 때까지 한 것 같다. 그래서 난 늘 노느라 바빴다.
남중학교에 진학하고 무협, 판타지 소설에 빠져있던 친구가 멋져 보여서 따라 읽었다. 읽다 보니까 흥미가 생겨서 당시에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책들을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미친 듯이 읽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책을 특히 열심히 읽었다. 고등학교도 남고로 갔는데 농구하는 친구가 (당시 말로는) 간지가 나서 따라서 농구를 시작했다. 남들처럼, 슬램덩크를 3번 정독하고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위대한 철학을 이해했다. 그 무렵, 나는 우리 학교에서 농구를 제일 잘하는 세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는 1년간 연애에 미쳤었다. 나는 개인폰도 없었는데, 매일마다 친구들 폰을 빌려서 문자를 하고 놀았다. 정말 미치광이처럼 첫사랑에 빠졌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이제 공부하자'라는 마음으로 다시 공부에 전념했다. 나는 학창 시절 중상위권 실력이었는데, 대충 10등 안에는 늘 들었던 학생이었다. 그렇게, 고3 때 악착같이 공부하고 국립대만 가자는 마음이었다. 당시엔 대학은 반드시 국립대를 가야지 효도하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가? 남들처럼 남중, 남고, 군대, 공대 테크트리를 뜻하지 않게 타버렸다. 공대는 '취직 잘되니까'라는 막연히 떠도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전. 화. 기(전기, 화공, 기계) 중 화공을 선택해서 국립대에 턱걸이로 진학했다. 그 왜, 7차 합격하고 그러면 대학교에서 전화 와서 '추가 합격하셨는데 축하드립니다.'라는 전화 말이다. 그때도 플스방에서 위닝이라는 축구 게임에 미쳐 있던 중 받았던 추가 합격 전화였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총대'라는 걸 얼떨결에 메고 최선을 다해서 미친 듯이 놀았다. 중고등학교 때 다녔던 학원 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과학선생님으로 미친 듯이 일했다. 1년 반 정도 중고등학교 과학을 담당하며, 아이들의 내신향상에 미쳐있었다. 원장선생님이 나를 너무 신임하셔서 못 그만두게 했었다. 그래서, '군대 빨리 가기'로 2주일 만에 군대로 도피하다시피 도망가면서 그렇게 학원을 그만둘 수 있었다.
군대에서는 전공을 살려서 화학병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힘들었지만 값지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잘한다는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고 그 재능은 군대에서는 최고로 값진 능력이었다. 일이 금방 손에 익었고, 선후임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덕분에, 군대에서 일본어를 독학하고 자격증도 땄다. 전역하고 편입을 하거나 일본 수능을 봐서, 일본 대학에 공대로 재 진학할 생각이었다. 그냥 막연히 일본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냥 복학하기로 결정하고 복학을 했다.
3학년으로 복학하고서, 선배들이 졸업 후 무얼 하는지 살펴보았다. KCC와 같은 도료 회사, 대우조선해양 같은 조선 회사, 삼성정밀화학 같은 유기화학회사, 제약회사 등 다양한 유형의 대기업 공업회사들로 취직들을 하시고 대부분 소위 말하는 '지방'으로 갔다. 나는 막연하게 재미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양한 동아리, 대외활동, 강연, 공모전 등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광고공모전에서 상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학생의 강연을 들었다. USB를 컴퓨터에 연결하면서, 최근에 만든 작업이라면서 광고를 보여주고 국내, 국외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았다며 자랑했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 저거 간지 난다.' 어릴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광고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광고에 '광' 자도 몰랐던 나는 도서관에서 마케팅 책을 읽으며 난생처음 공모전에 도전했다. 제일기획 광고 공모전. 클라이언트는 삼성 센스 노트북이었다. 지금 보면, 정말 형편없지만 톡톡 튀는 귀여운 아이디어들이 귀여웠던 인생 처음 만든 광고였다. 결과는 1차 합격. 그 후, 나는 발표를 하러 난생처음 이태원 제일기획에 입성하고 '오, 이거 간지 난다' 했던 기억이 있다.
25살. 광고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재밌었다. 도서관, 서점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든 광고 서적을 읽었다. 그리고 공모전에는 꾸준히 도전하면서 기획력과 크리에이티브를 키웠다. 와중에 내가 좋아했던, 좋아하는 광고는 뭘까?라는 시선으로 광고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단연 돋보이는 광고는 Apple광고 그리고 Nike광고였다. 당시라고 해봐야 7-10년 즈음 전이지만... 나는 나이키 광고처럼 고무적인 카피로 사람들을 일깨우는 광고가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오랜 조던 팬이었고, 조던 광고 혹은 나이키 광고는 나에게는 정말 신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런 광고를 만드는 회사를 알아보게 되었고, 그곳은 와이든 케네디(Wieden+Kennedy)라는 1980년대에 설립된 미국의 독립 광고 대행사였다. "Just Do It"으로 유명한 나이키 광고부터 Old Spice, KFC, Cocacola, NIke 등의 세계 최고의 광고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봤다. 미국인이어도 못 들어간다고 그런다. 근데, 진짜 진짜 진짜 광고를 잘하면 들어갈 수 있단다.
그래서, 2015년 3월 미국으로 광고 유학을 갔다.
철이 없었죠. 광고가 좋아서 유학을 가다니...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마이애미 애드 스쿨이라는 미국의 광고 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다. 그 기간 동안 국내, 국외 광고 공모전에서 대략 50회 이상 수상했다. 정말 세상에 있는 '광고제'라는 '광고제'에서 크고 작은 상을 모두 받아 보았다.
온라인 포트폴리오 만들고 글을 정성스럽게 쓰고 와이든 케네디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reative Director)에게 이메일 보냈다. 운이 좋게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광고의 제작을 총괄해서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팀장의 역할)에게서 답장이 와서, 회사에 와서 이야기를 하잔다.
나의 '김정은 채용공고' 아이디어를 무척 좋아 했었다. 주로, 작업 이야기, 어떤 광고를 만들고 싶은 지... 등, 전반적으로 광고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며칠만 프리랜서로서, 지금 진행 중인 Pitch(새로운 광고주 영입을 위한 광고기획서 개발)을 도와주지 않겠냐고. 나는 흔쾌히, 프리랜서로 며칠이라도 같이 일하고 싶다고 그랬다.
도전해 보자. 혹자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나? 인생은 너무 짧지 않은가?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라고. 나는 그걸 전적으로 동의하는 1인이다. 그러니, 시도해 보자. 한번 해 보자. 나라고 못 할 것 없지 않은가? 구글에서 일해보자. 페이스북에서 일해보자. 내 사업을 시작해 보자. 뭐든 해 보자. 지금 내 직장이 꿈의 직장이 아니라면, 꿈의 직장으로 만들거나 꿈의 직장으로 가는 꿈을 꿔보자.
'미취광이 광고인'은 광고, 마케팅,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나아가길 희망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꿈이 있고, 좋아하는 일에 미칠 수 있다면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내 미약한 8.5년간의 미국 생활을 간접 경험하면서 꿈을 키우길 바란다. 그리고 꼭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왜냐면, 나 같은 정말 평범한 사람도 이뤄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