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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Oct 11. 2017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서클 오브 라이프> 속 그곳, 밴쿠버 린 캐니언 공원에서 다시 시작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니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점심에 탄 비행기는 시계를 다시 토요일 아침으로 돌려두었다. 한국보다 16시간이 느린 캐나다에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 가족은 우선 렌터카를 빌려 린 캐니언 공원 Lynn Canyon Park으로 향했다. 책을 마무리하느라 여행 준비가 부족했던 나는 밴쿠버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딱 한 곳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만지고 있었다. 지난해 다녀온 제주의 비자림이 떠올랐다. 폭우가 쏟아져 우비를 입고도 흠뻑 젖었던 기억. 이번에도 만만치 않게 고생스러운 숲 산책으로 캐나다 여행의 문을 열게 될 듯하다.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한층 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색채로 그려진 한 장의 아름다운 사진 같은 이야기! 《달팽이 식당》의 저자 오가와 이토의 소설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서로 다른 아픔을 가진 세 여자가 회피하듯 떠나 새로운 풍경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세 편의 단편을 엮은 것이다. 위태로운 삶에서 탈출한 세 여자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가슴 울리는 문장들로 엮어진 지독한 아픔과 희망의 이야기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이 슬픔에도 언젠가 끝이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젖을 채 떼기 전에 아이를 잃고 삶의 의지도 잃어버린 요시코. 우연히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성적인 의도 없이 수유를 해 주는 ‘모유의 숲’이라는 기묘한 가게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일하게 된 요시코의 이야기를 담은 《모유의 숲》, 어릴 적 엄마에게 방치되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평생 증오하던 엄마가 죽자 그녀가 남긴 꽃무늬 슈트케이스를 들고 어린 시절을 보낸 캐나다로 떠나게 된 가에데의 이야기를 담은 《서클 오브 라이프》, 우연히 만난 첫사랑과 무작정 몽골로 떠난 미미의 이야기를 그린 《공룡의 발자국을 따라서》를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자신과 타인을 위로하는 진정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

book.daum.net

 


긴 휴가를 낸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캐나다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침 오가와 이토의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이란 단편소설집을 읽고 있었다. 오로라가 근사하게 그어진 표지가 마음에 들어 사온 책이었다. 첫 번째 단편소설부터 독특한 설정이 무척 인상 깊어서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처음 수록된 소설에는 돈을 내고 모유를 아기처럼 빨아먹을 수 있는 가게가 나온다. 퇴폐업소는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 '서클 오브 라이프’에 들어서니 주인공이 걸은 숲, 린 캐니언 공원에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밴쿠버 외곽에 있다고 한다. 마침 캐나다로 떠나는 가족 여행에 며칠이나마 합류하기로 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걷기 힘들 만큼 위험한 곳에는 조그만 길이 만들어져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 그대로였다. 규모 또한 상당했다. 그런데도 이곳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 아니라 밴쿠버라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 서클 오브 라이프> 중에서


1912년에 문을 연 린 캐니언 공원은 현재 250 헥타르 규모로 밴쿠버에서 가장 크고 인기 있는 공원이라고 한다. 소설 속 문장처럼 밴쿠버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 비가 그치기 전 공원에 도착해 버렸다. 첫날부터 우비를 꺼내 입고, 비 냄새가 섞여 더욱 신선한 숲의 공기를 내뿜던 린 캐니언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좀처럼 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었다. 위를 한참 올려다 보아도 얼마나 커다란지 가늠이 안 되는 크기. 중간중간 쓰러져 있는 나무의 몸통을 따라 뿌리에서 줄기 끝까지 걸어보았다. 그제야 나무들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 있는지 헤아려진다. 땅에서, 돌멩이에서 시작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이끼도 깨끗하고 앙증맞다. 이곳에 오기 얼마 전 한국에서 차로 몇 시간을 달려 이끼계곡까지 다녀온 일이 무색해졌다. 이토록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이끼인데.


린 캐니언의 하이라이트는 사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다. 깊은 협곡 위에 걸린 철제 다리, 서스펜션 브리지 Suspension Bridge. 바닥에서 50m 위에 걸려 있는 다리에서는 밑을 내려보는 일은 고사하고 난간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다리가 꽤 많이 흔들렸다. 사진은 찍어야겠고, 몸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한쪽 손은 난간에서 뗄 수 없고, 비가 내려 바닥은 미끄럽고... 겁쟁이인 나에겐 난이도가 높은 길이었다. 게다가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건너기도 어렵다.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의 두 번째 단편 '서클 오브 라이프’의 주인공은 가에데, 우리말로 '단풍'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다. 히피문화에 빠진 가에데의 엄마는 단풍이 그려진 국기를 가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캐나다에서 가에데를 낳았다. 어린 가에데는 캐나다의 숲 속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커뮤니티 안에서 성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픈 기억을 갖게 된다. 엄마의 여동생인 이모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가에데가 다시 캐나다에 도착했다. 노숙자가 된 엄마가 죽었단 소식을 들은 뒤였다. 엄마가 남긴 유일한 유품, 낡은 꽃무늬 슈트케이스와 함께.


밴쿠버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오후, 나는 다시 린 캐니언 공원에 가기로 했다. 왠지 모르게 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꽃무늬 슈트케이스를 가지고 간다. 열쇠도 주머니에 넣었다.

-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 서클 오브 라이프> 중에서


첫 일정부터 무리할 순 없어 우리는 숲길을 잠시 산책하고 서스펜션 브리지를 다시 건너 돌아왔다. 호기심 많은 아빠가 현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자, 동생이 '모르는 사람 아니냐? 왜 먼저 아는 척을 하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앞서 걷던 나는 뒤를 돌아 아는 척을 했다.


“아니야. 괜찮아. 여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끼리 '헬로, 헬로' 하는 거래.”


가에데가 그랬다.


<다정한 여행의 배경>을 받아보고, 린 캐니언 공원을 걷게 되었을 때 나는 조금 안도했다. 다시 시작하고 있구나. 배경 여행. 책이 나왔다고 이 여행이 끝나 버릴까 봐, 시시해질까 봐, 의욕을 잃었을까 봐 내심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동행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의 제목을 빌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계속해서 나올 테니. 그 안에 근사한 배경이 들어있을지 모를 테니.




'<다정한 여행의 배경>을 엮다' 연재에 동행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배경 여행 이야기를 종종 들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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