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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Oct 04. 2017

태풍이 다가오던 맑은 날, <태풍이 지나가고> 배경에서

물론, 배경여행은 계속 됩니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정말?”

“정말이야. 정말. 정말.
….
정말이야.”

- <태풍이 지나가고> 중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를 처음 보았을 땐 이 장면의 의미를 놓쳤다. 두 번째 보면서 주인공 료타가 왜 네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는지 알아차리고 무릎을 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왜 그렇게까지 울컥했을까. 내가 쓴 첫 책 <다정한 여행의 배경>이 바로 앞에 꽂혀 있었기 때문일까. 밴쿠버행 비행기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를 볼 수 있어 너무나도 반가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아껴두었다.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캘거리에서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으니까. 그리고 도쿄에는 이 영화의 배경이 있으니까.



기내에서 다시 보게 된 <태풍이 지나가고>는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음에도 잠시도 게을리 볼 수 없는 영화였다. 매분 매초 이야기가 꽉꽉 차있다. 새로운 장면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고, 몰랐던 의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 가족이다. 아니 가족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빠 료타와 엄마 쿄코는 이혼했다. 료타는 젊은 시절 문학상을 하나 받았고, 그때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유명 작가가 되길 꿈꾸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 생계를 위해 사설탐정 일을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한 일종의 취재라고 말한다. 아들 싱고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고, 엄마에겐 새 남자친구가 있다. 싱고와 료타는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태풍이 다가오던 날, 료타는 싱고를 데리고 자신의 엄마이자 싱고의 할머니인 요시코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는 아빠에게 싱고도 엄마도 눈을 흘기며 이야기한다. 세 번 연속으로 말하면 거짓말 같다고. 둘은 아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늘 꿈을 품고 살아가는 일’이라 말하는 아빠에게 “정말이냐” 묻는 싱고. 그 말에 또 다시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며 대답해버린 아빠. 마지막에 한 번 더 “정말이야”를 덧붙인다. 영화관에서 보았을 땐 왜 이 장면이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새로이 발견한 장면의 의미를 몇 번이고 되새기며, 싱고의 할머니집이 있는 단지로 향했다. 단지란 '생활, 산업 등에 필요한 각종 인프라를 집중시켜 모아둔 구획'이란 뜻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쓰는 아파트 ‘단지’. 일본에서는 이 ‘단지’가 영화나 드라마, 만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단지’를 주제로 하는 잡지도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주거문화라 ‘이런 게 소재가 되나’ 싶지만, 단독 주택이 많은 일본에서는 단지 생활과 문화를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무대가 된 기요세 아사히가오카 단지 清瀬市の旭ヶ丘団地 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실제로 9살부터 28살까지 산 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쿄 도에 속해 있지만, 도쿄 역에서 전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이곳을 찾아가며, 나는 도쿄가 둥글지 않고 횡으로 기다란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베드타운 성격의 마을이기 때문에 도심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가기 위해 나는 전차에 앉아 두 시간을 보냈다. 니자라는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10분을 더 가서 아사히가오카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부터는 ‘이곳이 과연 도쿄가 맞나’ 싶은 풍경이 이어졌다. 밭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파주 외갓집으로 향하는 기분이 되었다.



료타가 홀로, 또 싱고와 함께 내린 단지센터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도 내렸다. 한적하고 오래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아사히가오카 단지는 1967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태풍이 오기 전엔 날씨가 유난히 맑다고 했던가. 찬연한 날이었다. 맑은 하늘이 투명한 햇살을 뿌리고 있었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매미가 크게 우는 소리, 가끔 자전거가 지나가며 내는 소리 정도였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영화 속 배경과 모든 것이 똑같이 남아있단 사실이었다. 주인공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오른 정류장도, 맞은편에 있는 빵집도, 아들을 배웅하러 나온 요시코와 료타가 걷던 길도, 싱고가 복권인 줄 알고 주운 종이가 있던 잔디도, 요시코가 손을 흔들던 아파트 난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대로였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주민들은 거의 노인뿐인데 실제로 아사히가오카에서 마주친 주민들도 거의 70,80세는 되어 보였다. 영화 속 모습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것만 같이. 료타가 요시코에게 사다준 몽블랑 케이크를 사러 양과자점 호른 ホルン 에 들어갔다. 얼핏 보아도 오래된 공간에서 나는 주인 할아버지께 “벤치에 앉아서 먹고 싶은데 일회용 포크를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건네준 포크가 든 비닐엔 갈색 때가 잔뜩 껴있었다. 일본에서 보기 드문 모습을 한 그 포크 비닐이 이곳의 낡음을 더욱 깊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데 였다면 바꿔달라고 했을 만도 한데, 감사히 받아 들고 나왔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고, 다른 포크를 받아도 비슷할 것 같았다.




마을을 떠나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남편은 곁에서 기다리던 할머니들께 먼저 타시라고 양보했다. 할머니들은 도리어 “왜 안 타느냐?” 물었고, “먼저 빨리 타라”고 다그쳤다. 한 분은 다음 정류장에서, 다른 한 분은 다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다음 정류장까지는 200 ~ 300미터 거리. 느리게 걸어도 5분이면 도착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걸음으로 메울 수 있는 간격이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영화에서 료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배경이다. 기요세 역 清瀬駅 에서 료타는 서서 먹는 저렴한 소바를 사먹고 버스에 오른다. 나는 그 가게를 구경만 하고 전차에 탔다. 일본 남부 지역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던 태풍은 곧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태풍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과연 꿈을 이루었는지, 꿈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료타처럼 첫 책이 세상에 나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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