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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Sep 27. 2017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어도

배경 여행을 함께한 사람들

교정을 본 주는 하루에 거의 3시간씩 자며 원고를 보았다. 마지막 교정을 끝내고 나서는, 차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고치고 싶은 부분이 계속 보일 것 같았다. 자려고 누우면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아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 글을 고치는 내내 생각했다.

'아… 이젠 제발 다른 사람의 문장을 보고 싶다.'

'그림을 좀 그리고 싶다. 글자는 지겹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글은 여러 차례 고쳐졌다.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휘갈겨 쓴 초고는 노트북으로 옮겨져 몇 번이고 수정되었고, 블로그에 공개하기 위해 매만져졌다. 아리송한 표현은 기자인 남편에게 물어보곤 했다. 또 내가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나투어 웹진에는 편집 담당자가 있어 오탈자 등을 체크하고 발행해주었다. 이 과정 안에만 해도 지은이 나 외에 많은 사람이 있다. 이제까지 '배경여행가'랍시고 작품 이야기만 해왔는데 사실 나의 첫 책 안엔 고마운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부족한 문장을 살펴봐준 사람들 뿐 아니라, 여행의 추억을 완성시켜준 많은 이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눈 앞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의 친구가 서있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우린 결혼식에 다녀온 한 일본 여성을 헬싱키의 사우나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는 총각파티를 하고 있는 청년들을 만났다.


주문을 하고 화장실(남녀공용)에 들어가려는데, 한 청년이 나오면서 “냄새가 심하게 나요. 하지만 저 때문이 아니에요”라고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넸다. 속으로 ‘이런 일로 오해받기 싫은 마음은 전 세계 공통이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냄새를 공유했다’는 데 연대감을 느꼈던 것일까? 새우요리를 한참 먹고 있는데, 나보다 앞서 화장실을 사용한 청년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말을 건넸다.

“친구가 곧 결혼을 해서 파티 중인데요. 아무 말이라도 괜찮으니 수첩에 메시지 하나만 적어주세요.”

일본인 친구와 나는 각자의 언어로 ‘결혼 축하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시길 기원합니다’라고 적었다. 대여섯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작은 수첩을 들여다봤다. 서로 줘보라며 돌려 보았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히라가나를 어찌나 신기해하던지……. 붉은 볼에 순수한 미소를 띤 청년들이었다. 내 마음까지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진심으로 신랑과 그의 친구들의 행복을 빌었다.

- <다정한 여행의 배경> 중에서






그리고 여행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 글로 남겨둔 덕분에 그들의 얼굴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스토브 바로 옆은 이미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두 분의 여행 조합에 의해 선점되어 있었다. 스토브가 있는 열차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안내원이 가는 여정 내내 함께했다. 오징어를 주문하면 오징어를 구워주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다. 다자이 오사무도 안내원과 수다를 떨며 집으로 향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그룹은 일본의 남쪽 도시 후쿠오카에서 혼슈의 최북단인 이곳 아오모리까지 여행을 왔다고 했다. 스토브 열차의 낭만을 충분히 이해하는 연령대인지 오징어도 샀다. 나는 옆에서 남편이 “스토브 하나 붙어 있다고 400엔이나 더 받는 것은 도둑”이라며 툴툴대고 있었기 때문에 맥주 두 캔만 주문했다.

할머니가 다 구워진 오징어를 휴지에 담아 나눠주셨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상대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세련된 호의를 베푸는 어른들을 만나곤 한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 생각했다.

- <다정한 여행의 배경> 중에서




물론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은 몇 자의 언어로 표현하기엔 오히려 마음이 가벼이 보일 것 같아 걱정이다. 여행의 동행은 물론, 배경이 된 작품을 함께 본 후 감상 교환, 원고 교정작업 등 모든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다.


책이름을 결정해야 할 때 처음엔 ‘배경 여행’ 혹은 ‘여행의 배경’, ‘배경을 천천히 거닐다’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정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책 제목을 받아보고 주변에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나의 살갑지 않고 냉정한 성격을 비웃으며 “안 어울린다”라고 놀려댔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붙어야 할 단어가 붙었단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 제목은 한 작품에 빠져들어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곳들을 혼자만 신나서 앞서 걷던 내 곁에 따뜻이 있어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붙었을 것이다. 아니, 붙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은 늘 앞서 걷는 뒷모습뿐 일 때가 많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다시 시작하는 배경여행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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