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메모 한 장

아무 의도도 없이 흘려 보낸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

by SH

오후 두 시 반.

바람이 생각보다 더 불었다.


서윤은 오늘,

카페 대신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한낮의 햇빛이 무겁지 않은 날이었다.

나무 그림자가 발등에 닿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노트를 펼쳐놓고

한 장짜리 메모지를 꺼냈다.

요즘은 꼭 노트에 쓰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따로 적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손끝이 종이를 살짝 누르며 움직였다.

오늘의 문장은, 어쩐지 빨리 나왔다.

쓸 필요도 없이 이미 마음속에 있었던 말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어떤 얼굴은 마음속에서만 더 선명해진다.”


메모지를 한쪽에 내려두고

그 위에 작은 돌멩이를 올려두었다.

그러곤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윤은 오늘 하루치의 감정을

조금 내려놓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 자리를 비웠다.

근처 자판기로 걸어가는 사이,

바람이 한 장의 종이를 살짝 들어올렸다.


돌멩이는 흔들렸고,

메모지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산책로 가장자리 풀숲 쪽으로

조용히 흘러갔다.


지훈은 그때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책을 들고, 이어폰은 꽂은 채

천천히 걷던 중이었다.


눈에 띄는 흰 종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종이는 가볍게 접힌 상태였다.

무심코 펼친 종이 안쪽에

손글씨가 하나 보였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어떤 얼굴은 마음속에서만 더 선명해진다.”


지훈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알아챘다.

이 글씨는 서윤의 것이었다.

그 필체는

어딘가에서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던 결이었다.


지훈은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그저 조용히 품었다.


서윤이 돌아왔을 땐

종이는 사라져 있었다.

바람이 가져갔나,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오늘 하루 종일 마음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때로는

흘려 보낸 문장이

누군가의 손끝에서

다시, 마음으로 건너간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그날의 문장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