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다 대신, 오늘은 숨만 놓았다
아침 공기는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창가에 걸린 얇은 커튼은 아직도 밤의 온도를 조금쯤 머금고 있는 듯했고,
나는 그 옆을 스치듯 지나며 커튼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바깥은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 않았다.
이른 시각의 거리에는 느슨한 정적이 깔려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차가 남기는 잔열 같은 소리가,
오히려 더 깊게 고여 있는 고요를 깨닫게 했다.
싱크대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따랐다.
물이 유리 벽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오늘따라 더 길게 귀에 남았다.
내가 다시 숨을 들이쉬었을 때,
컵 속에서 고여 있던 물이 잔잔히 흔들렸다.
식탁에 앉아 천천히 물을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어쩐지 낯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이렇게 또렷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의아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삼켰을 테지만,
오늘은 목구멍을 스치는 그 미묘한 시원함이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걸 너무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괜찮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실제로 괜찮아서라기보다는
괜찮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이 내뱉는 순간,
마치 무언가를 임시로 봉합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걱정 어린 눈길,
혹은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낯선 두려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눌러 담는 간단한 주문 같았다.
“괜찮아.”
그 두 글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며들어 있었을까.
속으로는 무너져 내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웃으며 넘겼던 순간들이
오늘 아침 물을 마실 때처럼
몸 안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그 말을 자주 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다친 무릎을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정말로 괜찮아질 것 같은 주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은 점점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을 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그저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정말로 내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자라지도 못하고
조용히 죽어버린 건 아닐까
가만히 의심이 들었다.
거실을 천천히 돌았다.
아무것도 없는 방 한가운데 서서
손가락을 깍지 끼고 힘없이 늘어뜨렸다.
바닥에는 작은 흠집이 몇 개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그 상처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문득 그 흠집이 내 마음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거기 그렇게 조용히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나 괜찮을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부엌으로 다시 돌아가
텅 빈 싱크대에 손을 얹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스테인리스의 온도.
그 위에 손바닥을 오래 두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은 닫힌 채였다.
“괜찮다”는 말이 오늘은 이상하게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지 않았다.
억지로 꺼내려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 말 없이
조용히 손만 싱크대에 두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온 빛이
내 팔꿈치에 머물렀다.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그게 다였다.
아무 위로도, 아무 다짐도 없이
그저 빛 하나가 내 몸 위에 닿은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조금은 괜찮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조금은 괜찮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순간을
괜찮다고 속이며 살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척,
알아서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가만히 눌러 담았다.
오늘 아침처럼,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렇게 하루를 맞이할 수도 있는 걸까.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걸 바라보고,
싱크대 위에 손을 얹고,
텅 빈 거실에 서 있는 것으로
충분할 때도 있는 걸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도 가끔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지고,
그 말로 나를 속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 말을 참아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가만히 오늘을 견뎌보기로 했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도 혹시,
오늘은 괜찮다는 말을
조금 쉬어가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