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이를 꼽으라면 단연 그녀가 으뜸이다.
첫인상은 새침한 미소에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이미지의 팀장이었고,
나는 그녀가 속한 회사에서
프로젝트별로 일을 계약하는
파트너 작가로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작업을 같이 할수록
그녀의 허당미(?)가 포착됐다.
* 인터뷰 약속 있던 날 *
"팀장님, 인터뷰하러 왔는데 사무실 문이 잠겼어요.
오늘 약속 잡힌 거 맞나요??"
"제가 전달한 것 같은데 지금 다시 확인해볼게요"
(장소랑 인터뷰이를 전날 체크 안 하신 듯)
* 출판물 콘셉트 회의 후 대화 *
"팀장님, 회사에서 제시한 콘셉트랑
의뢰기관의 요구사항이 너무 다른데요.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요?"
"어차피 기관 요구에 맞춰줘야 일이 끝나니까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기관 요구대로 하면, 저희 일이 많아지는데요?"
"음... 항상 그렇더라고요.
저도 간단하다고 듣고 시작했는데..."
(갈무리를 할 줄 알았던 그녀가 기관의 요구에 순응)
* 인터뷰 후 자료 요청하고 무안한 경험*
"팀장님, 기관에서 자료를 미리 넘겼다는데요?"
"아 제가 깜박했어요. 지금 보내드릴게요"
(미리 보내줬으면 인터뷰 때 당황 안 했을 텐데..)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흥분해서 물었고
그녀는 실수에 당황하지 않고
때에 따라 웃으며 대처했다.
그녀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한 공공기관의 책을 함께 집필할 때였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목차와 원고 수정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당시 의뢰기관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요구가 선을 넘고 있었다.
급기야 인쇄를 앞두고 기관 담당자가
그녀가 작성한 원고에 빨간 줄을 긋고
문단 전체를 앞뒤로 이동하는 등
대대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이 정도면 흐름 자체가 흔들려서
재구성을 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나는 열이 잔뜩 받은 목소리로 부당함을 호소했다.
"지금 와서 원고를 이렇게 많이 수정하면
후반 작업을 어떻게 해요? 너무하네요.
전부터 원고 확인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이쯤 되면 기관 담당자들도 책임 갖고
같이 작성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리한 요구에 확실히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다시 해볼게요. 작가님은
담당한 부분 원고만 수정해서 주세요." 라며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이후에도 “언젠가 끝나겠죠." 라면서
몇 번이고 상대 요구에 맞춰 원고를 수정하고
그 시간을 버텨냈다.
덕분에 긴긴 프로젝트가 끝났고
책은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나는 당시에는 팀장의 태도가
답답하고 수동적이라고 생각했다.
팀장이면 부당함에 맞서야 하는 거 아닌가
내 기준에 맞춰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가진 장점이었던 것 같다.
그때 팀장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책 완성이 미뤄졌을 테고 나 역시
피곤한 퇴고를 거듭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때는 내가 잘나서 버티는 것 같았는데
끝나고 보면
저 사람 덕분이구나 싶어요.
-나영석 PD가 어느 프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