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에어비앤비를 한참 열심히 할 무렵의 일입니다.
독일에서 왔던 어떤 게스트가 체크아웃하고 나서 저는 방 청소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허어억...
방이 아주 쓰레기장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그동안 몇 번 있었지만 이 친구가 사상 최악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사진을 좀 찍어둘 걸 그러지 않은 게 후회되네요.
무슨 버터를 그렇게 쳐 먹는지 설거지 안 하고 담아놓은 그릇들과 냉장고에 묻어 있는 버터기름을 닦느라 혼났습니다. 침대에서 짜장면을 먹었는지 이불과 침대 커버에 짜장면이 엄청 튀어있고 쓰레기 통에는 정액이 들어있는 콘돔이 버젓이... 어후 썅,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요.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배수구를 뜯어내어 지저분한 머리카락들과 샴푸 덩어리들을 떼어내는데 인상이 찌푸려지고 한숨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현타...
하아... 나 지금 여기 앉아서 뭐 하고 있냐?
쭈그려 앉아 속으로 계속 혼잣말을 되뇝니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돈 좀 벌려고 하는 건가?
나 회사에서 돈 잘 벌고 있잖아?
이 일을 하는 게 무슨 가치를 만들어내는 거지?
내가 일을 하면서 기쁘지 않은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을 처음으로 해봤던 것 같습니다.
건물 운영은 잘하는 편이어서 오랜 기간 공실없이 잘 운영했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공실이 몇 개 생겼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제 건물을 요즘 다시 돌봐주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혼자 다니지 않고 아내랑 함께 다니고 있는데요. 이케아에 가서 커튼과 문고리, 신발장 등 인테리어 소품들을 잔뜩 사서 아내와 함께 방을 꾸몄습니다.
저는 대충 빨리 하고 집에 가서 컴퓨터 앞에 앉고 싶은데 아내는 꽤나 신이나 보입니다.
실제로 디자인 감각도 있고 아버지가 가구점을 하셨어서 그런지 인테리어 센스도 좋습니다.
꼼꼼하게 이것저것 체크하며 조금씩 개선시켜 나가는데, 방이 점점 나아지는 게 보이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힘들지 않았냐 물어보니 너무너무 재밌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허허.. 어떻게 그게 재밌을 수가 있지? 신기하네..
저에게는 이런 인테리어부터 자잘한 집수리까지 모든 것이 다 스트레스였거든요.
건물주를 그냥 월세만 받는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건물주도 직업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적성에 맞지 않는 편이 확실합니다. 뭣도 모르고 잘못 뛰어들었다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이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제 바로 옆에 있다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건물주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다음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먼저 해보면 어떨까요?
1. 이케아 가서 가구 구경하는 게 즐거운가? 아니면 귀찮은가.
2. 마트에 가서 공구 코너를 보면 설레이고 흥분되나? 혹은 전혀 관심이 없거나.
3. 살고 있는 집에 블라인드, 조명, 수도꼭지 등이 고장 났으면 직접 수리하는가? 돈 내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가? 아니면 방치하는가.
4. 집에 전동드라이버를 가지고 있는가? 사용하는 것을 즐기나? 쓸 일이 생기면 뚝딱 해치우나? 한숨부터 쉬면서 계속 미루는 건 아닌가?
5. 망치질해서 뭔가 만들고 공구리를 치는 작업들이 즐거워 보이고 흥분되나?
6. 벽에 페인트를 발라서 마음에 드는 색으로 칠해보고 싶나? 이런 일들이 귀찮지 않은가?
7.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새로 인테리어 해야 한다면 직접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
8. 전기에 대해서는 잘 아나? 전기가 무섭지는 않은가?
만약 이런 질문들에 Yes 가 대부분이라면 건물주가 일단 절반 정도는 적성에 맞는겁니다.
(여기서 건물주란 저같은 생계형 건물주를 말하는 것이지, 몇백억 짜리 빌딩을 가진 건물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건물주의 일을 사람 사이의 문제와 기술적인 문제로 구분하는데요. 위 질문들은 기술적인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저는 거의 대부분 No 네요.
적성에 안 맞는 일은 한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이 일을 정리하고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들로 돈을 벌며 살고 싶습니다.
하하,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 동안은 아내 도움 좀 받으며 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