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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Sep 11. 2022

복지? 행복?

_ 행복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아래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its own way. - <원작 그대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중에서


소설 안나 카레니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문장만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해보고자 하는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이 글의 내용이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이라고 오해할까 봐 미이 밝혀둔다.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문장만 인용하는 것이다.)


최근 엄청난 폭우가 있었고, 몇 주만에 다시 태풍이 지나갔다. 폭우와 태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의 저소득층 - 혹은 빈민층, 사실 어떻게 부르는 것이 그분들을 존중하는 호칭인지 모르겠다. - 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분들 중에는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지고 며칠 동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각종 뉴스는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던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에 대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도배가 된다. 정치인들은 준비했다는 듯이 정책을 쏟아내고, 서로 상대방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 뉴스는 다른 뉴스로 덮이고, 나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정책을 새롭게 시행하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시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사고가 나면, 어김없이 이 과정이 반복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과정의 반복은 나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제자리를 도는 듯이 보이지만, 나선형으로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0-30년 전에 비하면, 분명히 좋아졌으니까, 나선형 발전이론(?)을 부정할 수는 없다.


복지 정책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가 기억하는 모든 정권은 선거기간 중에는 항상 ‘복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전 정권의 복지 정책을 비판하며, 본인들의 복지정책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복지정책을 이야기할 때, 들어보면, ‘저소득층’ 혹은 ‘소외계층’, ‘빈민층’, ‘빈곤층’들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라는 단어를 거의 항상 찾아볼 수 있다. 분명, 사회의 다양성이 증가했고, 빈부의 격자도 커지고 있고, 중산층이 사라지는 듯한 사회에서 ‘맞춤형’ 지원과 정책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 맞춤형이라는 말속에 ‘나는 너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고, 내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과 네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엄연히 다르며, 넌 나와는 다르게 이 정도 쥐어주면 행복해할 거야’라는 무의식이 반영되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나만의 생각일까?


‘복지’의 목적을 ‘사람들의 삶이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글의 처음에 인용한 안나 카레니라의 첫 구절인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its own way.’에서 복지의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백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거의 비슷할 수 있다. 이는 각자가 어느 사회 계층에 속해 있더라도 비슷한 이유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나와 가족이 건강하고, 나와 가족이 아프더라도, 돈 걱정하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고, 내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집이 있고, 내 수입이 내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아주 고가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제철과일, 수입산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조기 해외연수는 못 가고, 골프 사교육은 못 받더라도, 동네 초등학생용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등은 편하게 다닐 수 있고, 일 년에 세네 번은 에버랜드 같은 곳을 놀러 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을 할 수 있고, 그리고 현재 직장에서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으나, 혹시 직장을 잘리더라도, 다시 취직을 하거나 작은 사업을 해서,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행복의 조건은 나이에 따라 다르지 않다. 초딩인 우리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순간은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었을 때 (캐비어나 푸아그라를 먹었을 때가 아니라, 온 가족이 맛있는 돼지갈비나 삼겹살을 먹었을 때이다), 온 가족이 에버랜드나 워터파크에 가서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친구들과 조잘거리며 놀았을 때이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한다면, 어떤 이유로든 칭찬받았을 때가 있다. 아이들이 행복한 순간은 내가 앞에서 말한 어른인 내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과 전혀 다르지 않다.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맞춤형 복지 정책, 맞춤형 지원’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보편적 조건’을 먼저 생각하고, 이 보편적 조건을 모든 사람이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를 가지고 복지 정책을 출발한다면, ‘보편적 조건’보다 아주아주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본인이 가진 것 중 일부를 내어 놓아서, 그것이 보편적 조건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와 너, 누구나 행복을 위한 보편적인 조건은 같고, 내가 좀 내어놓더라도 내가 가진 것은 여전히 보편적인 조건보다 많으니까 말이다.


오늘 포탈에서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노인 공공일자리사업’의 내년 예산이 줄어서, 약 10%의 노인 공공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물론 민간기업이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한다는 정책대안도 함께 이야기는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노인 공공일자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70대, 80대의 노인 중에 민간기업의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4,50대 직장인들 대부분은 정년까지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노인 공공일자리사업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월 30시간 정도 근로를 하시고, 약 27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으신다고 한다. 물론 ‘자본적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노인 공공일자리 사업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사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동과 임금이 이 분들의 ‘행복을 위한 보편적인 조건’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면, ‘사회 가치적 효율’로서는 매우 효율적인 사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 ‘사회 가치적 효율’이라는 말은 내가 이 글을 쓰며 방금 만들어낸 용어다. ‘사회 가치적으로 중요하다’고 적으려다가, 왠지 ‘효율만이 절대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사회에서 이야기하려면, ‘효율’이라는 낱말을 꼭 붙여야 될 것 같아서 ‘사회 가치적 효율’이라고 용어를 만들어 보았다.-


난 지금 행복한가? 물론 삶이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불행한 순간도 있고, 행복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내가 지금 ‘내 인생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을 정의한다면,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하기 위한 보편적인 조건을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 일 것 같다. 그럼 나는 지금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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