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동물(?)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물론 느끼는 것이 보람이 아니라, 자기만족 혹은 자기 우월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의 본성(?)에는 자신이 아는 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는 대부분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대학교육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난, 대학교 교육은 ‘정답을 가르치는 교육’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정답이 없는 수많은 상황 앞에서 결정 혹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대학교 전공수업시간에 배운 많은 지식은 ‘정답’을 맞추기 위한 지식이었다.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수’라는 존재가 있었다. 사수는 내가 모르는 ‘직장생활의 노하우’와 ‘업무수행을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랬던 나의 사수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 과연 맞는 정답(?)이었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회사에서 내 위치가 후배들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물론 이제는 가르친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코칭한다’라는 표현을 한다. 좋은 코치가 되기 위해, 수많은 코칭 이론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좋은 코치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을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코칭’도 ‘리더십’도 정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다. 만약 정답이 있다면, 도서관에는 이와 관련된 책은 단 한 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코칭에 대한 것도, 리더십에 대한 것도 도서관에서 한 세션을 차지하고 있고, 지금도 끊임없이 새 책이 나오는 것을 보면, 누구도 정답을 찾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과 초등학교 2학년인 두 딸이 있다. 여느 부모들처럼, 같이 있는 시간과 비례하여 잔소리를 하게 된다.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하지 마라. 등등…… 내 나름대로는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삶의 지혜(?)를 가르치기 위한 마음이 잔소리로 나온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잔소리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이 푸는 각종 문제집에서 틀린 문제들을 아직은 풀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서, 더 이상 아이들이 푸는 문제집을 내가 풀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내 잔소리는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 혹은 잔소리를 하면서 -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 거지?’라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세상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듯이, 내 아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내 아이들이 앞으로 살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을 살아갈 내 아이들은 분명히 나와 같은 사람이지만, 나와는 다른 인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잔소리를 하며,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럼 난 지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답을 준 책 제목이 루이스 세뿔베다가 지은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이다.
내가 지금 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고양이인 내가 갈매기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와 갈매기는 ‘동물’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전혀 ‘다른 종족’이다.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물고기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식성 정도 일 것이다. 나와 내 아이들 역시 ‘사람’이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전혀 ‘다른 인류’이다.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찾는다면,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지만, ‘맛있는 것’이 다른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내가 가르쳐야 할 것은 ‘등을 굽혀 털을 세우는 법’도, ‘발톱을 세우는 법’도, ‘지붕 위에서 다치지 않고 뛰어내리는 법’도 아닌, ‘하늘을 나는 법’이다. 난,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 우리들은 네게 많은 애정을 쏟으며 돌봐왔지. 그렇지만 너를 고양이처럼 만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우리들은 그냥 너를 사랑하는 거야. (……) 우린 우리와는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아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 우리와 같은 존재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야. 하지만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런데 너는 그것을 깨닫게 했어. 너는 갈매기야. 그러니 갈매기들의 운명을 따라야지. 너는 하늘을 날아야 해. 아포르뚜나다, 네가 날 수 있을 때, 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과 우리가 네게 가지는 애정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거란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의 진정한 애정이지. …… -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유왕무 옮김. 이억배 그림. 바다출판사) 중에서
위 인용문은 책 속에서 고양이 소르바스가 아기 갈매기 아포르꾸나다에게 해준 말이다. 날아본 적이 없는 고양이가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그리고 가르쳐야 되는 이유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나와 같은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이것이 가능해졌을 때, 나와 다른 존재가 본인의 운명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다른 존재끼리의 진정한 애정이라는 지혜는 현재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같은 인간이지만, 고양이와 갈매기만큼 서로 다른 종임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나와 다른 종을 나와 같은 종으로 만들려고 하기에 지금의 사회 갈등과 극단적인 갈라짐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지금 우리는 아기 갈매기를 고양이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은 백과사전을 통해 비행술을 완전히 공부하고, 아기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고양이들은 금기를 깨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선택한 인간은 ‘시인’이다. 비행술 전문가도, 비행사도 아닌, ‘시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른 종이 서로를 사랑하고, 인정하게 된 순간, 나와 다른 종이 그의 운명을 따라 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인 ‘이론적인 기술, 혹은 지식’이 아니라, ‘시인의 감성, 혹은 인문학적 교감’이었다. 물론 시인의 도움 이전에 시행한 이론적인 비행술 학습과 전수는 아기 갈매기가 나는 법을 배우는 데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기 갈매기는 날 수 없었다. 시인의 ‘감성’과 ‘인문학적 교감’이 더해졌을 때, 아기 갈매기는 날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이 서로서로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결코 ‘이론적 기술’은 아닌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간이라는 것 이외에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나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운명에 따라, 날 수 있도록 가르치고자 한다면, 내가 기술을 공부해서, 기술 이론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그는 날 수 없다. 인문학적 교감과 감성적 나눔을 통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스스로 뛰어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줄 때, 그는 세상을 향해 날갯짓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점점 인문학의 가치는 폄하하고, 기술적 전수만을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기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는 사용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논의는 경시되는 것 같다. 정확하게는 ‘그 기술’을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그 기술의 ‘가치’를 칭송하고, 그 기술 안에 담겨야 할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그 기술로는 날 수는 없으며, 퍼득거리며 달리거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부양해 볼 수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만, 난 내일도 내 아이에게, 회사의 후배에게 ‘내가 공부한 기술’을 가르치며(혹은 코칭한다고 이야기하며) 날아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잠깐 부양한다면, 나도 그도 ‘성공’이라고, ‘날았다’고 믿고, 자축할지도 모른다. 나부터 정신 차려야 할 텐데…… 항상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