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아직은 할 수 있는 추억 만들기
내일부터 추석 연휴이다.
난 어려서부터 명절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서 친척집을 돌아다녔었다. 어른들께는 인사를 드리고, 또래(사촌형제)들이 있으면, 같이 놀기도 하였지만, 그 자체를 좋아했기보다는, 명절에 해야 하는 어떤 의무였었다. 우리 집은 여러 가지 사정상, 친척들과의 '정'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설날은 그래도 세뱃돈이라는 수입이 있어서, 투덜대지 않고, 부모님을 따라나섰었지만, 추석은 정말 '의무 인사'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철이 들면서, 더 다니기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명절이 좋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긴 연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소에 먹기 힘든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먹고 싶으면, 언제라도 해먹기도 하고, 사 먹기도 할 수 있는 음식들을 그때에는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다. 잡채, 동그랑땡, 생선전, 소갈비찜, 식혜, 수정과...... 우리 집은 이런 음식들을 친척집(?)에 가서 만들지는 않았고, 집에서 우리 식구끼리 만들어서 먹었었다. 食口, 한자로 밥식, 입구 라는 의미에 정확히 일치했었다. 어린 시절에는 음식 만드시는 부모님 곁에서, 음식이 완성될 때마다 집어먹는 재미였었고, 철이 든 다음에는 요리에 내 손을 보탰었다. (우리 집은 아들 삼 형제였고, 둘째였던 내가 명절에 집안일을 많이 도왔던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생각해 보면, 추석이 좋은 이유는 '연휴'였던 것 같다. 설날은 겨울방학 중이어서, 연휴의 의미가 별로 없었지만, 추석은 학기 중에 있는 꿀 같은 연휴였었다. 나 역시 학교가기를 싫어하는 평범한 초중고생이었다.
철이 들면서, 친척집 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졌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른들의 '질문'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는 잘하냐?', '반에서 몇 등이나 하는데?', '대학교는 어디쯤 갈 수 있는데?'였고, 대학생 때는 '군대 언제 갈꺼니?', '여자친구는 있니?', '취직은 어떻게 할꺼니?', '부모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빨리 졸업해서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였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회사는 튼튼하니?', '월급은 많은 편이니?', '결혼은 언제 할꺼니?' 였고, 결혼한 후에는 '아이는 언제 가질꺼니?', '아이는 건강하지?', '아이는 공부 잘하니?' 였었다. 아마도 아이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도 10여년은 지속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질문들에 딱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시는 경우도 있었으나, 때로는 그냥 궁금해서,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 자신의 자식들의 처지와 비교해보고 싶어서 물으셨던 질문들이었다. 즉, 대답 역시 그분들이 원하는 정답이 정해져 있었고, 그 정답을 말하면 그뿐인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나와 아내가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명절이면, 친척집을 돌아다닌다. 돌아다닌다고 말하시는 좀 그런 것이 본가와 처가 두 곳만 인사드리러 간다. 그나마고 본가는 서울이어서 차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명절마다 꼬박꼬박 가지만, 처가는 부산이어서, 매번 가지는 못한다. 부산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실 때도 있고, 전화만 드리고 명절이 지나고 가기도 한다. 이제 부모님들은 명절이라고 해서, 다른 친척들 집을 돌아다니시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우리 딸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우리 집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딸을 두어서 그런지, 이 '친' 혹은 '외'라는 용어가 싫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일 뿐, 왜 '친'과 '외'로 구분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구분하여야 할 때는 사시는 지역을 붙여서 부르도록 가르쳤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두 딸아이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어릴수록, 감각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감각은 어른이 되면서 무뎌지고, 대신 사람을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인어른은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그래서 내 아내는 명절이면, 엄청난 대가족이 모여서 지낸 기억이 있다. 사촌도 몇 십 명이나 되고, 명절이면 몇 십 명의 사촌들과 함께, 어른들이 주신 용돈을 들고 동네를 누빈 기억을 '추억'으로 가지고 있다. 내 아내는 지금도 사촌 형제들만이 아니라, 내 아내의 양가 친척분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어린 시절을 공유한 추억'은 어른이 되면, 그 추억 속의 갈등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그 추억 속의 웃음만 남는 것 같다. 사라진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잊거나, 그 갈등을 '재미'로 바꾸어 기억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을 함께 이야기하며, 같이 웃고, 같이 흥분할 친척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은 분명하다.
우리 딸들은 더 이상 대가족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것을 추억으로 가질 수는 없는 세대이다. 다행(?)히도 내 형제들, 아내의 형제 모두 자녀를 둘씩 낳아서 키우고 있지만, 이 사촌들이 모두 모여서 한 이불속에서 부대끼며 밤새 조잘거릴 일은 지금까지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 딸아이들이 이다음에 성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 명절에 이런 일이 있었지'라는 추억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아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명절 추억은 '가족', 말 그대로 '식구'들끼리의 추억일 것이다. 그렇다고 명절마다 여행을 갈 수는 없다. 경제적 형편도 형편이지만, 아직은 명절에 손주를 기다리시는 양가 부모님께 손주를 보여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는 난 구세대임이 분명하다. 그럼 어떤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라이프'를 보면,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죽은 후 영원히 간직할 추억으로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들며, 느꼈던 산들바람'을 선택한다. (사실 내 기억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 워낙 오래전에 본 영화여서. 그래도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 아니면 할머니의 무릎을 베는 것은 확실하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은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수요일. 두 딸아이는 학교에 갔지만, 일찍 오는 날이다. (추석 연휴 전이어서가 아니라, 원래 수요일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고, 방과후수업이 없는 요일이다.) 아이들은 오늘도, '아빠, 우리 집에 올 때 집에 있을 거지?'라고 물어보며, 등교하였다. 아빠가 '취준생'인 것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이 좋은 아이들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전'을 만들어봐야겠다.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그래도 명절이면 우리 식구가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재미를 가져야겠다. 동태전이나 호박전은 평소에도 종종 해 먹는 음식이니까, 평소에는 못 해 먹는, 동그랑땡이나 깻잎전을 같이 만들어봐야겠다. 아이들은 처음 만들어보는 것이니, 모양은 엉망이겠지만, 모양이 엉망일수록, 웃음은 커질테니까. 그리고 이러한 시간 역시, 지금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