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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Oct 15. 2023

19. 잘 난다는 건 잘 떨어지는 것

_ '무빙'의 조인성 님의 대사가 유독 머리에 남는 이유는?

"날아오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떨어지는 게 중요한 거더라고요. 그래서 잘 난다는 건 잘 떨어지는 거예요." - '무빙(디즈니플러스)' 중 조인성 님(김두식 역)의 대사 중에서


올해 하반기에 가장 많은 이슈를 몰고 다닌 OTT의 작품 중 하나는 디즈니플러스의 '무빙'이다. 성격상 매주 새이야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보는 것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20화까지 모두 나온 후에 며칠간 몰아서 시청했다.


사람은 '난다'라는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흑백 TV의 만화 속의 로봇도, 영웅도 '난다'는 능력은 기본적인 능력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필독 도서였던 '갈매기의 꿈(리처드 바크 지음)'에서도 가장 높이 날고 싶다는 목표는 하루하루를 먹이사냥에 집착하는 다른 갈매기들보다 위대한 목표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시절 국어시간(혹은 문학시간)에 배웠던, 이해하기 어려운 시와 소설을 쓴 이상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날개'에서도, 지금은 그 줄거리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는 구절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DC와 마블로 대표되는 미국 만화의 영웅들 중에서도 나는 것은 기본이다. (물론 처음부터 날 수 있는 영웅도 있고,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서 나는 영웅도 있고, 거미줄을 타고 나는 것처럼 빌딩사이를 누비는 영웅도 있지만, 어쨌거나 날 수 있는 영웅들이 많다.)


그러나, '무빙'의 영웅에게 난다는 것은 영웅이 되기 위한 기본도 아니고, 처음부터 스스로 즐기는 능력도 아니다. '무빙'에서 김두식이 나는 법을 어떻게 익혔는지는 나오지 않음으로, 그의 아들인 김봉석이 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난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타고난 능력인데, 조절되지 못하는 능력이고, 남에게 감추어야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능력을 감추기 위해서, 친구도 편하게 사귀지 못하며, 항상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쌓아야 하며, 이 능력을 나쁘게(?) 이용하려고 하는 어른들로부터, 감추고 숨어 살아야 하는 능력이다. '난다'는 것은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조절되지 않는 두려움'이며, 감추어야 할 능력이다. 그리고, '잘 난다는 것'은 '높이 나는 것'도, '빨리 나는 것'도, '공중곡예를 하는 것'도 아니며, '잘 떨어지는 것'이다. '잘 날지 못하는 이유'는 높이 몸을 띄울 줄 몰라서가 아니라, '잘 떨어질 줄 몰라서'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듣고 나면, '누가 몰라?'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 자신도 내 삶에서의 이 이야기는 몰랐었던 것 같다. (혹은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내 삶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던 같기도 하다.) 난 항상 '높이 나는 것'이 '잘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잘 날지 못하는 이유'는 '잘 나는 법을 몰라서, 높이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법'을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지, '떨어지는 법'을 공부하려고 하지는 않았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공포증'을 고치려고 했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치려 하지도, 스스로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스무 살 경부터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난 삼십여 년 동안을 이렇게 '높이 나는 법'과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달려왔다.


지금, 나는 땅에 떨어져 있는, 내려와 있는 상태이다. 내가 내 브런치의 다른 글에서 '추락하지 않고 내려앉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난 추락하지는 않고 내려온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물론 잘 떨어지지는 못해서, 땅에 몸을 부딪혀서, 생채기는 좀 났지만, 그래도 추락을 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추락하지 않았기에, 다시 날을 수 있으며, 다시 날기 위해, 지금도 무언가를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준비해 온 것은 '높이 나는 방법' 또는 '공중곡예를 하는 방법'이었지, '잘 떨어지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내 주위에서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이들은 내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라고 용기를 주는 감사한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 나에게 '잘 떨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지는 않는다. 아마 그 사람들도 '잘 떨어지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난 그동안 항상 추락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추락하지 않고 내려앉는 것을 고민했고, 그것은 '적당한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적당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잘 떨어지는 방법'을 아느냐의 문제였었다. 그리고, '잘 떨어지는 방법'을 몰랐기에, 난 본능적으로 높이 나는 것을, 어쩌면 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며, 비행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난 그동안 그렇게 높은 곳을 날 지도 못했고, 곡예를 즐기지도 못했는 지도 모른다. 추락하지 않고 싶다는 마음에 항상 내려앉을 곳이 보이는 안전한 높이에서, 안정적인 비행만을 해왔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높은 곳을 날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방법'이 아니라, '잘 떨어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두 딸아이 모두 수영을 배우고 있다. 물론 각자 다른 곳에서 배우고 있지만, 수영을 배우고 오면, 서로 무엇을 배웠는지 이야기한다. 둘째는 나를 닮아서, 물을 많이 무서워하고, 그래서 강습반에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진도가 약간 늦는 것 같다. 나도 사실, 물을 너무 무서워해서, 강습반 회원 중에서 진도가 가장 늦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나랑 둘째는 수영을 하고 나서, 그날 배운 것, 힘들었던 것을 이야기하면, 죽이 척척 맞는다. '발차기 어땠어?', '음파는 잘했어?', '팔젓기는 어땠어?', '킥판 없이 해봤어?' 등등. 그런데 다음번 수영 수업 이후에는 이렇게 물어봐야겠다. '하다가 숨차지 않았어?', '숨차면 바로 일어나서 숨을 쉴 수 있어?', '수영하다가 일어날 때, 허우적대지 않고, 잘 일어날 수 있어?', '지금은 수영장에서 배우는 것이니까, 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중요해. 언제라도 잘 일어날 수 있으면, 힘들거나, 숨 쉴 수 없을 때는 바로 벌떡 일어나서, 숨을 충분히 쉬고 다시 수영하면 되니까. 우리 둘 다 물이 무섭지만, 지금 수영장은 언제라도 일어나면, 얼굴이 물 위로 나와서 숨 쉴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일어나고 싶을 때, 물속에서 넘어지거나, 허둥대지 않고 잘 일어나는 거 아닐까? 수영장에서 잘 일어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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