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한 내 수령하세요.”
그간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습니다. 내년에는 더 덥고 더 춥다는데,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축의금 환불 안내차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00님은 2000년 10월 14일 장미예식장 토요일 16시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환한 미소로 저의 시작을 축하해 주셨는데 안타까운 소식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결국, 결혼이 종료되어 제가 받은 마음 일부를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간단하게 결혼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결혼 유지 기간은 2000년 10월부터 2019년 12월까지로 7005일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들(2001년생)과 딸(2003년생)이 있습니다.
짧은 지면이라 쉽게 전달하자면, 저희 결혼의 장르는 시트콤으로 시작해 아침드라마가 되었다가 스릴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드라마에 가까웠으며 폭력성은 15세 관람등급 정도입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습니까? 조금 더 상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이혼의 사적인 기록]을 참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브런치스토리’에 연재 중입니다.
결혼식 당일 신부는 없고 신랑만 둘이었다는 여러분의 평가 덕분에 웃으며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저의 이혼 소식이 마음 아프시다면,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7005일 동안 내내 불행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들은 행복했고, 즐거웠습니다. 어쩌면 그런 날들이 더 많았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준비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러분들에게는 이혼에 이른 진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조금 더 나아가 고민해 보았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 보니 결국은 하나더군요. 우리는 사랑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소중한 것은 응당 아끼는 것이 맞는데, 아끼고 가꾸는 법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사라질 마음 하나 붙잡고 영원할 것이라 믿은 둘의 잘못이 큽니다. 귀한 시간과 마음을 담은 봉투로 저희의 출발을 지켜봐 주신 여러분들에게는 참 송구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박수가 다만 부부로서의 삶만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셨을 테죠. 이혼 후 그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 역시 이제 그의 행복을 빌어봅니다. 우리가 각각의 삶에서 행복하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겠죠.
피로연에서 30분 만에 뻗어버린 신부를 호텔까지 옮겨주신 선후배분들께, 핑크색 머리를 하고 축가를 불러주신 후배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그날의 다정한 축하를 잊지 않고 홀로 잘 살겠습니다.
축의금 환불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편지에 동봉된 축의금 내역 확인(엑셀 파일)
2. 이혼 축하 메시지를 포함하여 환불 금액(식사비를 제외한)과 계좌번호(예금주명) 회신
3. 환불 기한은 2024년 12월 31일까지입니다.
*이혼 축하 메시지는 선택 사항입니다.
이혼 후 환불까지 꽤 시간이 걸린 점,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리고, 기한 내 수령하십사 당부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2024년 9월 30일 도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