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치기의 종말"
12시가 넘은 시간이다. 친구 B에게 전화가 온다.
“야, 지금 K네로 와. 휴가 나왔는데, 여자친구랑 헤어졌대.”
K의 여자친구로 말하자면, K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순정을 다 받쳐 얻은 첫사랑이다.
어려서부터 한동네 친구라 서로 웬만한 처지는 다 아는 사이인데, K가 그렇게 진지하게 집중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뭔가에 집중하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다. 그저 순둥이 애 늙은이 같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내 보기에 깡마르고 그리 예쁜 편도 아닌 그 여자애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 빛에 기가 눌려 함부로 농담도 건네지 못했던 기억이다.
그런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은 K에게는 우주를 잃은 것과 같다.
B와의 통화를 끝내고, 일의 망설임 없이 이불에서 벗어나 택시를 잡아타고 K네 집으로 향한다.
마음이 동하여 단숨에 달려오기는 하였으나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갈 시간이 아니다. K의 집은 3층짜리 연립주택 2층에 위치해 있다. 본능적으로 벽을 훑는다.
‘지금은 긴급상황이야!’
지난날 담치기의 공포가 올라올 틈도 없이 발을 성큼 담벼락에 올린다.
지하방의 창틀을 밟고, 몸을 일으켜 다시 다른 쪽 발을 도시가스 배관에 척 올린다. 2층까지 순식간에 올라간 나는 창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놀란 B와 K가 창문을 연다.
창틀에 걸터앉은 나는 신발을 벗어 두 손에 들고 조용히 착지한다.
술을 마시며 세상 모든 욕을 다 끌어다가 친구의 그 귀하디 귀한 첫사랑에게 퍼부었다.
"이런 십장생수박씨발라먹을*&^%$^&^^&&%%^&&"
"어떻게 너한테 **&%^$^#@@#$%^&*&^$%^#&%"
"아오 진짜 *(&^$%%^&(*&^%$#@#$%)!!"
친구가 오열을 해서 나는 더 심한 욕을 한다. 그러면 친구는 더 울고, 나는 더 욕을 하고...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집 밖이다. 서둘러 우리를 집으로 보내는 K. 오늘 같이 죽자는 우리를 등 떠밀어 보내더니 서둘러 집으로 들어간다. 내가 너무 심하게 욕을 했나?
사실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친구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녀였기에 말이다. 아마도 그 친구에게는 전부였을 그 사랑이 떠났다는 게,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다 미워하면, 그 친구에게는 미움이 남지 않을까 싶었다.
몇 년 뒤 두 사람은 결혼했다. 젊어서는 마음이 뚝뚝 끊어지는 것이라고만 알았다.
끝이면 다 끝인 줄만 알았던 우리는 그 난리법석을 떨었다. 콧물 눈물 흘리던 K의 모습이 생생하다.
집들이에서 본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오래 기억된다. 녀석이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그녀 덕분이다.
이 사랑의 결실에 내 역할이 컸다. 그날 밤 나의 의리 있는 방문이 불러온 결과라 확신한다. 내 심한 욕이 어이가 없어 다시 만날 용기를 냈을 터다.
역시 여자는 의리다. 뿌듯한 담치기의 추억이다.
연립주택 도시가스 배관을 타면서 과거 담치기의 공포를 이겨낸 나는 기숙사 월담의 상습범이 되었다.
스무 살의 젊은이에게 10시 귀가는 잔인하고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러니 담을 넘을 수밖에 없다.
상습적인 담타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나는 강제 퇴사 대상이 되고 말았다.
살짝 잔재주가 많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교수님이 기숙사 행사 진행을 조건으로 그간의 월담은 없던 일로 해주시면서 1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월담도 마무리가 되었다.
담치기의 종말이다.
담 너머 알 수 없는 모험과 도전을 즐겼던 나, 이제 '가 닿지 않아도 뻔한 것들이 더 많게 느껴지는 나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더 큰 용기를 내봐야겠다.
그 알만한 것들에 도전해 보는 것,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
그런 용기를 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