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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Mar 05. 2022

1화. 파리의 크리스마스 악몽

프랑스 파리 여행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굳게 걸어 닫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 년 중 유일한 시간이 바로 크리스마스지요. (…) 그러니 크리스마스가 비록 금전적으로는 제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른 식으로 제게 복을 가져다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은총이 크리스마스와 함께 하기를!"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럴>, 비룡소, 2003, 19쪽)




 크리스마스이브에 파리를 여행하다니. 우중충한 하늘 아래의 낭만스런 파리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비록 3주 치 짐을 담은 배낭이 많이 무겁긴 했지만. 미리 예약해 뒀던 한인민박에 짐을 두고 나오기에는 파리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아 먼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에는 짐을 맡길 수 있으니 모네 그림부터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유럽 전역을 여행한 덕에 유명하다는 미술관은 많이 가봤는데도 오랑주리 미술관은 특별했다. 총 8개의 수련 연작은 새하얀 방의 곡선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새하얀 전시실과 밝은 조명은 그 안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을 압도하는데, 벽면을 꽉 채우는 작품의 거대한 크기에도 숨이 멎는다. 게다가 눈높이에 맞게끔 작품이 걸려 있기 때문에 더 마음껏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모네의 <수련> 앞에 앉아 그림을 보다 보면 계속해서 발견되는 새로운 색깔들에 지루할 틈이 없다. 선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데도 구분되는 나무기둥과 나뭇잎, 물과 물에 비치는 그림자, 서로 다른 수련들이 머릿속을 황홀하게 채워주었다. 모네의 그림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호크니, 르누아르 등의 작품도 볼 수 있어 아주 재미있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



 여행의 시작이 좋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런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올렸다. 아침 일찍부터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길을 떠났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친구와 나는 간단히 맥도널드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기분 좋은 느낌도 잠시,

여기서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내 마음처럼 흐린 파리 시내




 악취 가득한 지하철을 50분이나 타고 도착한 파리의 끝자락에는 가로등도 없이 장대비만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숙소가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3분이라고 했으니 일단 뛰었는데 아무리 지도를 따라가도 숙소는 나오지 않았다. 10분 넘게 걸어 도착한 숙소는 심지어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숙소 연락처로 한참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나왔고 그제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한인 민박이었다. 여성 전용 4인실에, 1박에 25유로로 저렴한, 후기가 좋은 방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방이 너무 좁았고 친구와 나는 예상과 다르게 한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4인실이 아니고 6인실이었다. 나눠준 수건은 찌든 때가 눈에 보이는 노란색이었고, 방바닥은 찐득찐득 발에 달라붙었다. 공용 샤워실은 양팔을 다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는데 샤워 커튼에서는 쉰 냄새가 났다.

  친구와 나는 경악을 했고 여기서 5일이나 머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 지친 우리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그냥 여행을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다. 그래도 서로를 어르고 달래며 일단은 내일 하루 머물 새로운 숙소를 구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저녁 9시였고, 비가 너무 많이 왔으므로 당장 오늘은 여기서 자야 했다. 눈물을 머금은 채로 1.5배는 더 비싼 호텔을 예약하고 내일 아침 8시에 바로 나가자고 약속했다.


내 마음처럼 먹구름이 낀 파리 날씨



“이런 데서 자는 걸 아빠가 알면 엄청 속상해하실 거야”


 좁은 침대에 친구와 같이 눕고는 훌쩍거리며 얘기를 나눴다. 하루 온종일 메고 다닌 가방 때문에 어깨도 아팠고, 교통비 아끼겠다고 걸어 다녔던 탓에 다리도 아팠다. 비도 너무 많이 맞아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푹 쉬려고 예약했던 숙소는 오히려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아무리 배낭여행이라도, 내가 가난한 대학생이라도, 돈을 쓸 곳에는 써야 했다. 이렇게까지 엉망인 곳에서 자면서 여행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이 아시면 정말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실 거야.'




 숙소에는 어느 정도 돈을 써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는 쪽잠을 잔 후 아침 일찍 짐을 모두 싸서 나갔다. 계약금만 결제했던 상황이라 미리 양해를 구하고 1박 값만 추가로 계산한 후, 악몽 같은 민박에서 벗어났다. 민박보다 100배는 깨끗한 새하얀 호텔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친구와 나는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자 생각이 났던 것은 이 날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이었다.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기대와 아주 멀어졌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내야 하니 케이크를 사러 나갔다.


 하지만, 악몽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음과 달리 예뻤던 루브르 박물관



 크리스마스 당일 파리는 문 연 곳이 거의 없었다. 일찍 저녁을 먹고 온갖 카페를 찾아다녔는데도 케이크 파는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케이크가 이미 다 팔렸거나 문을 아예 열지 않았거나. 한 시간을 넘게 비 오는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지친 다리와 허무한 마음으로 호텔에 돌아와야 했다.


케이크 대신 먹은 조그만 디저트



 신의 은총이 크리스마스와 함께 하기를 믿으며 떠난 여행이었는데, 신의 은총은커녕 조금 남았던 여행의 설렘과 낭만도 다 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5박 6일을 계획했던 파리 여행에 대한 기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남은 여정이 걱정되기만 했다.


 앞으로는 여행에 기대를 걸지 않기로 했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래서 내게 어떤 복이 올 것이라고 기분 좋은 상상을 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의 동네 사람들처럼 낙천적인 사람이 되기에는 힘든 타지 생활 중이었으니. 차근차근 내일을 생각하고 예상치 않은 즐거운 상황에 기뻐하며 사소한 이야깃거리에 웃음 짓는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거창한 아름다움보다는 아주 기본적인 걸 충족시키는 그런 여행 말이다.


 다시 한번 여행에 낭만은 없다고 단정 지으며 파리에서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내 마음처럼 쓸쓸해 보이는 파리 개선문




1일차: 네덜란드 틸버그 - 프랑스 파리 - Le Souffle - 오랑주리 미술관 - 근처 맥도날드 - 숙소

2일차: 새로운 숙소 - Kodawari Ramen - 근처 카페 탐방 - 튈르리 정원 - 숙소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프랑스 니스 2박 (12/29~12/31)

이탈리아 베니스 1박 (12/31~1/1)

이탈리아 피렌체 3박 (1/1~1/4)

이탈리아 밀라노 2박 (1/4~1/6)

스페인 바르셀로나 3박 (1/6~1/9)

스페인 마드리드 2박 (1/9~1/11)



- 다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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