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여행
“우리는 허섭스레기 한 보따리를 든 채 좁다랗고 낭만적인 길거리를 떠돌았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단역배우 아니면 한물간 반짝 스타 같아 보였다. …. 대체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면 된단 말인가?"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민음사, 2009, 279쪽)
힘이 다 빠져 버린 파리 여행이었지만 디즈니랜드에서만큼은 함박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15만원의 거금을 들인 크리스마스 시즌 디즈니랜드는 환상의 땅이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도 괜찮았다. 물론 그 땅을 벗어나자마자 되찾아야 하는 현실 감각이 두렵긴 하지만.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지하철 표시를 따라 가다보니 금방 디즈니랜드에 도착했다. 들어가자마자 기념품샵에서 귀여운 심바 모자와 사랑스런 디즈니 인형들을 들고 깔깔대며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무서운 놀이기구는 잘 못 타는 탓에 올라프와 사진을 찍거나 퍼레이드를 구경하거나 회전목마를 타며 환상의 나라를 즐겼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힘이 빠질 때면 미리 챙겨간 초콜릿으로 당을 충전하며 폐장 시간까지 바쁘게 걸어 다녔다.
굳이 힘든 몸을 질질 끌며 폐장 시간까지 기다린 이유는 디즈니 영상과 함께 펼쳐지는 환상적인 불꽃놀이, 일루미네이션을 보기 위해서였다. 디즈니 노래에 맞추어 하늘에 그려지는 화려한 불꽃과, 모든 불빛은 다 꺼진 채로 분홍색 성에 비치는 디즈니 영화의 명장면은 그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홀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디즈니 환상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쇼가 끝나고 불이 켜진 순간 얼빠진 사람처럼 멍했다. 이제 다시 허접스런 보따리를 들고 좁다랗고 지저분한 파리의 길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디즈니랜드 안에서 만났던 귀여운 인형들과 아름다운 공주님들, 영화 속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멋진 세트장은 영원하지 않은 환상일 뿐이었다. 일루미네이션은 디즈니랜드 환상의 정점임과 동시에 그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에 기념품 샵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다들 손에 디즈니 기념품을 한가득 안고 비어 있는 자리를 찾고 있었다. 모든 잔치가 끝난 뒤의 시원섭섭한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나도 얼른 침대에 눕기를 바라면서 좁은 지하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숙소까지 걸어가는데 비가 갑자기 많이 쏟아졌다. 우산이 없던 나는 디즈니랜드에서 산 심바 모자를 우산 삼아 썼다. 환상은 정말 한순간인가보다.
디즈니랜드에서 하루 종일 노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다음 날은 베르사유 궁전에 가는 날이었다. 미리 예약한 시간에 맞춰 가기 위해 겨우겨우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궁전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던 전경은 또 한 번 환상을 보게 했다. 어제 디즈니랜드에서의 꿈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동시에, 허망감도 안겨 주었다. 벌써 400년이 지난 건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고 또 지극히 멀쩡해서.
왕비의 방을 지날 땐 낭만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나도 저 아름다운 캐노피가 펼쳐진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면, 화려한 시대의 공주가 된다면, 궁전의 드넓은 정원에서 조깅하는 저 청년이 된다면. 천진하면서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널따란 베르사유 궁전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400년 전에 이렇게 호화스러운 건물을 튼튼하게 지었을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까? 완벽한 대칭의 베르사유 정원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점점 이 시대를 살았던 서민의 입장으로 상상이 옮겨가면서 괜한 허무함이 밀려 왔다. 그래서인지 베르사유 정원을 다 둘러볼 힘이 없었다. 정원 중간쯤 가다가 그냥 벤치에 앉았다. 정원의 끝에 도달 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정원은 아름다웠다. 완벽한 대칭과 모난 구석 없이 가지런한 나무들, 수많은 관광객 속에서도 쓰레기 하나 없는 깔끔한 모래길. 그런데도 나는 드넓은 정원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아무리 예술적인 공간에 있다 해도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여행자일 뿐이었고, 이들의 역사에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나는 호화스런 궁전 속의 공주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 보다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하던 한 집안의 딸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조금 더 그럴 듯한 상상으로, 조금 덜 허무한 상상으로.
다시 파리 시내로 돌아와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떠올랐다. 나는 정말 ‘허섭스레기 한 보따리를 든 채 좁다랗고 낭만적인 길거리를 떠돌았다’. 책 구절 그대로였다.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한 거리를, 거울을 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초라한 행색으로, 그러나 모든 것을 무마시키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로. 나는 해가 한참 진 후에도 그렇게 길거리를 떠돌아다녔다.
파리에 도착한 뒤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달콤함과 쌉싸름함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단역 배우도 곧 다른 배역을 따낼 것처럼 보이고, 한물간 반짝 스타여도 현재의 여유로운 일상에 만족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마법이 순간순간 펼쳐졌다. 니스로 떠나기 전 날 밤, 나는 다시 한 번 낭만은 결코 없다고 다짐하면서도 조금은 낭만을 바라고 있었다. 환상은 영원하지 않더라도 순간의 마법을 경험한 기억은 영원할 테니. 니스에서는 조금 더 일상적인 마법이 펼쳐지기를 기도했다.
3일차 : 숙소 - 사마리텐 백화점 - 팔레 루아얄 - 라파예트 백화점 - Le Royal - 에투알 개선문 - 숙소
4일차 : 숙소 - 디즈니랜드 - 숙소
5일차 : 숙소 - 베르사유 궁전 - Bistrot Richelieu - 숙소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프랑스 니스 2박 (12/29~12/31)
이탈리아 베니스 1박 (12/31~1/1)
이탈리아 피렌체 3박 (1/1~1/4)
이탈리아 밀라노 2박 (1/4~1/6)
스페인 바르셀로나 3박 (1/6~1/9)
스페인 마드리드 2박 (1/9~1/11)
- 다음 화
- 3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프랑스 니스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