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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Mar 13. 2022

4화. 새해는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행


 “허수아비야, 너는 뇌가 필요 없어.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으니까. 아기들이 뇌가 있다고 많이 아는 건 아니잖아. 경험을 통해서만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단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그만큼 경험도 쌓이는 법이야.” (라이먼 프랭크 바움, <오즈의 마법사>, 김양미, 인디고, 2018, 192쪽)




 12월 31일, 2021년의 마지막 날 아침.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맑은 햇살에 잠이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니스의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그리고 코를 훌쩍였다. 머리가 띵하고 아팠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긴장을 잔뜩 한 채로 프랑스를 헤집고 다녔더니 기어코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문득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백신도 맞았고, 마스크도 두 장씩 쓰고 다녔지만 파리는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으니 코로나에 걸렸을 법도 했다.


 오늘의 일정은 이탈리아 베니스로 넘어가 불꽃놀이를 보며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이었는데,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나는 단순 감기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짐을 챙겨 니스 공항으로 향했다. 우선 코로나 검사부터 받았다. 기다란 면봉이 따끔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빨개진 코를 부여잡고 줄 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코로나는 아니었다. 그냥 친구의 감기가 내게 옮겨왔던 것뿐이었다. 코로나 시국의 여행은 이렇게나 마음 졸일 일이 많다.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고 베니스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베니스에서 만날 친구는 12월 31일이 생일이다. 우리는 둘 다 새해 카운트다운과 특별한 생일을 기대하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베니스로 가는 비행기에서부터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안개도 심하고 바람도 강해서 비행기가 많이 흔들렸다. 분명 공항으로 이동할 때까지만 해도 날이 맑았는데, 이렇게 급격히 날씨가 바뀌다니.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점점 커졌다. 기내의 승객들은 모두 안전벨트를 부여잡고 안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비행기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베니스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기장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승객들은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베니스는 이미 깜깜해진 이후였고 안개는 속눈썹을 적실 정도로 도시를 두텁게 가리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가 오늘의 불꽃놀이는 안개 때문에 취소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새해 전야를 기대했던 마음은 처참히 망가져버렸다.


안개가 가득한 베네치아





 그럼에도 우리는 꿋꿋이 베니스 본섬, 산타루치아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물의 도시 베니스는 육지보다 더 습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가득했다. 하지만, 안갯속을 밝히는 몽롱한 레스토랑의 불빛과 항구의 전등은 모네의 그림처럼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즐기는 해산물 음식과 와인은 돈을 펑펑 써도 괜찮을 만큼 나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안개와 콧물 탓에 섬을 더 둘러보지는 못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베니스에서 먹은 새우요리 / 안개 속으로 비치는 몽롱한 불빛들



 친구와 나는 와인을 마시고 볼이 발그레한 채로 버스를 탔는데, 그만 엉뚱한 곳에 내리고 말았다. 숙소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린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던 것은 부연 안개와 휑한 도로뿐이었다. 이미 쌩하니 떠나간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친구와 나는 한 줄로 서서 좁은 인도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갔다. 구글맵도 정확하지 않아 한 시간 가량을 도로 위에서 헤매다가 겨우 숙소 근처 골목길을 발견하고 안전하게 숙소에 도착했다. 비가 온 것도 아니었는데 안개 때문에 머리카락과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잘못 내린 도로 / 음산한 위험 표지판



 예기치 못한 궂은 날씨와 방황으로 당장 누워 자고 싶었지만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친구의 생일을 위해 얼른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맥주 한 병을 준비하고 새해 카운트를 셌다.


'5,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아’

‘꼭!’


 친구와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형식적인 덕담을 주고받았다. 힘겨웠던 하루를 되짚으며 2022년에 대한 기대도 나누었다. 평소와 달리, 아주 낯선 곳에서 새해를 맞이했으니 올해는 분명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며. 비록 불꽃놀이도 없고 맑은 하늘도 없고 반짝이는 별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2021년의 마지막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2022년의 시작도 두근거렸다. 지금껏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아주 평범하고도 특별한 마지막과 시작이었다.


귀엽고 조촐한 생일파티





 1월 1일의 아침, 우리는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일어나 간단히 빵과 커피를 먹고 다시 산타루치아 역으로 향했다. 안개는 여전히 섬을 가득 에워쌌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건물들 사이를 걸어 다니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안개를 헤치며 돌아다녔던 베니스의 골목은 마치 마법사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이 너무 많아서 이 건물이 저 건물 같았고 내가 뒤돌면 건물들끼리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겨 다닐 것 같았다. 곳곳에 있던 베네치아의 가면들은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듯했고, 우연히 발견한 가죽 노트 가게는 이 세상에 마법이 분명 존재할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하나도 같은 문양이 없는 수제 가죽 노트에 해리포터가 쓸 것 같은 만년필로 글씨를 끄적이고, 실링 왁스로 멋지게 편지를 봉하는 상상을 하며 천진한 꿈을 꾸기도 했다.


환상의 가게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금껏 여행했던 유럽과는 전혀 달랐다. 갖은 보석상이 모여 있는 아름다운 리알토 다리도, 작지만 골목골목을 탐험할 수 있는 곤돌라도, 약간은 섬뜩한 가면을 사고파는 사람들도, 그리고 네덜란드만큼이나 비싼 레스토랑들도. 앞으로 평생 경험하지 못할 색다른 광경을 마음에 담으면서 베니스에서의 새해를 두고두고 기억하리라고 다짐했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길을 잃고 코를 훌쩍였어도 이제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어졌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말했던 것처럼, 좋든 안 좋든 경험은 배움이 되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허리케인을 타고 베네치아로 날아온 도로시가 아닐까. 나의 모험은 동화같은 환상이 되지 않을까. 


배에서 찍은 리알토 다리


현란한 가면들





8일차 : 니스 에어비앤비 - 니스 공항 - 베니스 공항 - 산타루치아 역 - Trattoria ⅱ Vagone - 숙소

9일차 : 숙소 - 산타루치아 역 - 리알토 다리 - Bacaro Quebrado - 산 마르코 광장 - 배 - 베니스 메스트레 역 - 피렌체 이동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프랑스 니스 2박 (12/29~12/31)

이탈리아 베니스 1박 (12/31~1/1)

이탈리아 피렌체 3박 (1/1~1/4)

이탈리아 밀라노 2박 (1/4~1/6)

스페인 바르셀로나 3박 (1/6~1/9)

스페인 마드리드 2박 (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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