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여행
"세 시간 후, 기차는 피렌체에 도착했다. 약간 희미해진 햇살이, 그 때문에 한층 더 초여름 눈부신 빛으로 사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역 앞 광장으로 나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와 본 후로 처음인 도시의 공기를 마셨다. 피렌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관광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걸머진 도시. 밀라노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전혀 분위기가 다른 도시다. - 오고 말았어."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양억관, 태일 소담 출판사, 2015, 222쪽.)
베니스에서 피렌체까지는 4시간 반 정도 걸렸다. 이탈리아 기차는 깔끔하고 넓었지만 혹여나 누가 내 짐을 훔쳐가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에 빵빵한 배낭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피렌체를 피노키오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던 나는 꿈에서도 피노키오가 되어 붉은 지붕의 집들과 기다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들을 방방 뛰어다녔다.
어느새 도착한 피렌체는 꿈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어두운 밤이었는데도 붉은 벽돌은 반짝였고, 살짝 보이는 피렌체 대성당은 벌써부터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예술 도시의 강력한 유혹을 겨우 이겨내고 예약해 둔 한인 민박으로 향했다. 파리에서 민박에게 호되게 혼났기 때문에 피렌체 숙소도 걱정을 많이 했으나, 이번엔 가격이 그리 저렴하지도 않았고 확실한 사진 후기가 많았으며 나보다 준비성이 철저한 친구의 선택이었기에 예약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중앙역에서 5분쯤 걸으니 곧바로 민박이 나왔고 나는 걱정되는 가슴을 토닥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민박은 아주 깔끔했다. 게다가 당시 사람이 거의 없어서 친구와 나 예약했던 4인실이 아닌, 2인실을 사용했다. 친절하신 사장님은 저녁도 먹지 못한 우리에게 따끈한 라면을 끓여 주셨다. 오랜만에 익숙한 한국 음식을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피렌체에서의 첫 식사는 사장님이 차려 주신 제육볶음과 떡국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신년에 떡국은 먹어 줘야지. 감격스러운 떡국을 배불리 먹고 비로소 진짜 한 살을 더 먹은 후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깐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자던 친구와의 약속은 둘 다 이불속에 묻어 두고 점심 먹을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났다. 오랜만에 기차 시간이나 비행기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마음 편한 대로 여행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숙소를 나선 후 첫 번째로 향한 곳은 당연히 피렌체 대성당이었다. 벌써 유럽 9개국을 돌아다니면서 웬만한 성당 양식은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피렌체는 정말 달랐다. 처음에 성당을 멀리서 봤을 때는 화려한 문양의 천막이 덮여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독특한 색상의 조합과 정교한 문양이어서 약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디자인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참 가까이 다가가서야 성당 외관이 어떤 그림으로 덮인 것이 아니고 실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성당 외관은 분홍색, 초록색, 흰색이 고루 섞여 있었는데, 그 조합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세련되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붉은 벽돌의 돔은 이 화려한 색의 조합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별칭이 정말 잘 어울리는 외관이었다. 성당 내부는 외관과는 달리 수수했지만, 돔 부분에 그려져 있던 천장화는 그 어느 성당 못지 않게 화려하고 성스러웠다.
피렌체 대성당에서 느꼈던 감동은 도시를 걸으면 걸을수록 더 크게 다가왔다. 메디치 가문의 다스림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인 피렌체는 말 그대로 예술의 도시였다. 르네상스 예술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그 흔적이 바로 나타났다. 어느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단테의 생가라던지, 드넓은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라던지, 메디치 가문의 수집품이 모여 있는 피티 궁전이라던지.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는 과거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특히, 피티 궁전은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 라파엘로, 티치아노, 루벤스 등 유명한 고전 회화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으로만 얼핏 보던 그림들을 실제 크기로 눈앞에서 보니까 새삼 인간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인간은 직접 생명을 만들 수는 없어도 새로운 세계를 창작하고 표현할 수는 있다. 눈이 핑핑 돌아갈 만큼 화려한 세계를 말이다. 단테의 <신곡>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걸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신의 능력이 다 쏟아부어진 시기가 아니었나 의심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르네상스를 힘껏 느끼며 피렌체 도시를 거닐다가 젤라토 하나를 들고 베키오 다리 건녀편으로 갔다. 이미 도시는 어두워진 후였지만 여전히 빛나는 조명 덕분에 잔잔한 아르노 강에 비치는 베키오 다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다리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노란색 건물들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며 젤라토를 열심히 할짝거렸다.
잠시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다가 피렌체는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에 낭만이 없다는 명제는 아직 명백히 참이라고 믿었지만, 피렌체라는 도시는 정말로 낭만이 가득했다. 생계를 위협하는 가련한 현실을 산다고 해도 피렌체라는 도시는 나를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이곳에 머무는 4일만큼은 낭만을 충분히 느끼고 떠날 것이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아주 낯설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10일차 : 피렌체 숙소 - 피렌체 대성당 - 베키오 다리 - BORGO ANTICO - 피티 궁전 - GELATERIA(santa trinita) - 베키오 다리 - 시뇨리아 광장 - 피렌체 중앙시장 - 숙소
- 여행 일정 -
프랑스 파리 5박 (12/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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