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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n 10. 2024

2화

"이게 뭐야." 민지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식탁에 남은 식빵을 냉장고에 넣었다. 내심 윤서가 남은 식빵을 전부 먹길 바랐지만, 윤서는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다. 민지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며 부엌을 이리저리 활보했다. 컵과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가 설거지를 하고, 행주로 남은 물기를 닦고, 빗자루로 바닥도 한번 쓸었다. 민지는 스트레스를 푸는 중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바삐 움직이며 청소거리를 찾았다. 윤서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뭐긴 뭐야. 그냥 푸념하다 간 거지." 효성은 민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어차피 자신과 아무 상관없을 남의 이야기에 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효성은 주말 낮부터 분위기를 망치고 간 윤서가 되려 원망스럽기도 했다. 효성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윤서의 얼굴을 마주한 뒤엔 계속해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방에서 꼼짝 않는 윤서를 밖으로 꺼내오기 위해 오지랖을 부린 것이다. 이런 그녀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이별을 하겠다 말하며 나가버린 윤서는 어쩌면 앞으로의 효성의 삶에 중요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민지가 물었다.

효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질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솔직하게 답했다. 

"응,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민지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효성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민지를 달래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나도 걱정돼. 그런데 우리까지 고민에 빠질 필요는 없잖아. 그냥 윤서가 돌아오면 이야기나 들어주자고."


효성의 말을 들은 민지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그녀는 정말이지 투명한 사람이다. 효성은 이를 굳이 민지에게 알리지 않았다. 상대의 속마음이 훤히 읽힌다는 건 효성 자신에게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으니까.  


"그래! 윤서 돌아오면 같이 저녁 먹자." 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효성은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커피가 담긴 컵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윤서는 동네 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라테를 주문하고 싶었지만, 배탈이 날 것 같아 참았다. 이런 날에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평생을 창피할 것 같았다. 머그잔에서 커피의 김이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은은한 커피 향에도 윤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요즘 들어 몸을 움직이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머릿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커피 뜨겁겠지?'

'한 모금 마실까?'


윤서의 오른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움직여 커피잔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 입김을 불었다. 뜨겁고 쓴 커피가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겨우 들이킨 한 모금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다. 윤서는 점점 기다림에 초조해졌다. 


"언제 오는 거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딩동-


윤서의 외마디 후,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서는 곧바로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10초만 참았어도 기다림은 끝이 나는 거였는데, 윤서는 자신의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이 지친 만남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윤서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남자를 응시하며 혼자 생각했다.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은 2시 02분에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왔어?" 윤서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응." 남자는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그의 시선은 윤서를 지나 카페 내부를 훑었다. 

윤서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시선은 이내 윤서의 커피잔을 향했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하자. 헤어지는 게 좋겠어." 이전의 망설임과 다르게 남자의 말에 단호함이 느껴졌다. 

"하아-"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남자는 윤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원하던 거 아니야?"


윤서는 커피를 마시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에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윤서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관계를 끊어내는 것도, 자신의 남은 감정을 털어내는 것조차 그녀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는 점점 지쳐갔다. 사귀는 동안 지겹도록 본 그녀의 모습은 늘 이렇게 정적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에게 기다림은 언제나 익숙한 과제였다.  


"그래 맞아." 고민하던 윤서가 마지못해 말했다. "나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길 원했던 것 같아."

"그래, 그럼. 잘된 거네."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파하기 위해 말을 던졌다. 그의 몸이 의자에서 들썩였다. 

"그런데, " 윤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짐을 챙기던 중 그대로 멈춰 윤서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끝낼 관계였으면, 나는 이 카페에 미리 와 있지도 않았을 거야.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우리가 어느 정도 대화를 할 거라 생각했어. 

자그마치 1년 하고도 6개월이야. 넌 그 세월을 함께한 사람에게 단 10분도 할애하지 못하겠니?

오자마자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윤서는 점점 목이 메어왔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이제 와서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에겐 지금 윤서의 외침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후우-." 

윤서는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렇지만 다시 목소리를 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도 남자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윤서는 악착같이 눈물을 집어넣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익, 윽, 음.

꺼져." 




서신애는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큰 방을 쓴다.  부유한 부모님 덕에 그녀의 삶은 늘 풍요로웠다. 가지고 싶은 건 모두 가질 수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그녀에게 아쉬운 건 바로 '연애'였다.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연애는 해마다 신애의 신년목표에 기록되었다. 적당한 키, 늘씬한 몸매, 진한 쌍꺼풀과 두툼한 입술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한 번씩 뒤돌아볼 만큼 매력적인 이 여성이, 연애를 못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데이트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함께 카페에 가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러 가는 흔한 데이트는 수 없이 해보았지만, 그 만남이 연애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그녀와 한번 만난 남자들은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보이기에 모든 것을 갖춘 신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나, 우연히 윤서의 이야기를 엿들은 그녀는 하루종일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윤서 왔어?" 신애는 방에서 나와 거실에 있는 효성과 민지에게 물었다. 

"응. 지금 방에 들어갔어." 효성이 말했다. 그녀는 신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서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의 호기심이 우선인 신애의 태도가 싫었던 거다. 

"오늘 남자친구랑 헤어졌대?" 신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효성은 짜증 나는 말투로 답했다. 옆에 앉아있던 민지가 두 사람을 살피며 말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별 말 안 했어." 

"아, 그렇구나." 신애는 못마땅한 듯 효성을 흘겨봤다. 그녀 역시 효성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면 그만이었다. 


신애는 그대로 뒤로 돌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책상 위 노트북을 켰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애니메이션을 봐야 했다. 그녀는 만화, 캐릭터,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애니메이션학과 전공답게 그녀는 학우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마니아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이 만화를 즐겨보는 게 뭐 어때서?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생활에 불과했다. 신애는 <바람이 분다>를 틀었다. 따뜻한 설렘을 주는 감성적인 영화가 필요했다. 그녀는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시킨 채, 팔을 뻗어 과자봉지를 자신 앞으로 가져왔다. 와그작. 와그작. 감자칩을 먹으며 그녀는 서서히 바닷가 마을에 빠져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신애는 방문 밖에서 나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영화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적당히 해. 너만 힘들어?" 화가 난 효성의 목소리였다. 

'효성이 짜증이 났군. 쟨 매사가 불만이야.'


"넌 왜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해?" 민지 역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민지와 다투는 중인가 보네.'


"지금 얘 과민반응하는 거라고.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효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얘? 윤서 말하는 건가?' 신애는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그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일단 위로가 먼저지. 우는 사람 앞에서 그게 할 소리야?" 민지의 속상한 말투였다. 

'윤서가 울어? 왜?' 갈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신애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얘도 할 말 다 하고 온 거잖아. 야, 네가 마지막에 꺼지라고 했다며! 근데 뭐가 그렇게 속상해?" 효성이 답답한 듯 윤서에게 소리쳤다. 


대화가 중단되고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무언가 떠오른 신애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혼자 말했다.

"근데 나는 왜 이걸 엿듣고 있는 거야?"

그녀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었다. 큰 소리가 났으니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 요령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잘했다고! 나 잘했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서가 갑자기 소리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두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윤서는 눈물로 뒤덮인 눈을 소매로 훔치며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잘했다고 말해달라고! 나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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