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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l 01. 2024

5화

스윽- 스윽-


하얀 캔버스 위로 넓은 붓이 지나갔다. 윤서는 본격적으로 물감을 입히기 전에 캔버스에 프라이머를 바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윤서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커다란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붓을 위, 아래, 좌, 우로 움직일 뿐이었다.


"후우-"

윤서는 잠시 자리에 앉았다. 캔버스가 마르는 동안 따뜻한 커피를 마실 요량이었다. 그녀는 등굣길에 미리 사온 커피를 홀짝이며 하얀색의 빈 공간을 응시했다.


"흐음-"

윤서는 조용히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실 그녀는 머리가 아팠다. 개강과 동시에 '개인 전시'라는 멋진 포부와 걸맞은 크기의 캔버스를 제작했지만, 막상 시작이 두려워진 것이다. 이제껏 작업했던 캔버스 보다 훨씬 거대한 여백을 채워야 하는 터라, 윤서는 고민이 앞섰다.


한참을 망설이던 윤서는 이내 팔레트에 물감을 짜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짜인 물감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파란 물감을 가득 묻힌 붓을 캔버스로 가져가 점 하나를 콕 찍어보았다. 윤서는 파란 점을 보며 무언가 다짐한 듯, 붓을 더욱 세게 캔버스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캔버스에 파란색 선들이 그려졌다. 윤서는 홀린 듯 곧바로 다른 물감들을 팔레트에 짜냈다. 노란색을 섞어 초록색을 만들었다. 캔버스에 초록색과 파란색 선이 생겨났다. 이어서 빨간색 물감을 짰다. 그녀의 붓질을 계속되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어 주황색을 만들고, 또다시 선을 그렸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으니 보라색이 되었다. 윤서는 붓질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캔버스에 선을 그었다. 윤서의 팔의 움직임을 따라 선들이 생겨나고, 하얗게 비어있던 캔버스는 점점 색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윤서의 동작에는 그 어떠한 계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속적인 몸부림으로 색을 칠하고, 또 칠했다.


부욱-부욱-


"윤서, 무슨 일 있니?"

작업실을 둘러보던 교수가 윤서에게 물었다. 그의 말에서 윤서를 향한 근심이 느껴졌다. 교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갖 색이 뒤섞여 만들어진 까만 배경의 캔버스였다.


"아 네, 괜찮아요."

윤서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교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되었다.


"이번 작품은 크기가 대단하구나."

교수는 윤서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네. 이렇게 큰 그림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요."


"그래. 그런데..."

교수는 주저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 어떤 우울한 일이라도 있니?"


"네?"

윤서는 당황한 얼굴로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함에 좌우로 흔들렸다. 윤서는 아주 잠시 개강 전에 있었던 그녀의 이별 이야기를 교수에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렇게 사적인 일을 공적인 관계에 가져와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감정이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었고,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대부분 '사연'이다. 교수는 윤서의 그림을 보았고, 윤서는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것이다.


"아, 아니다. 열심히 해."

교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윤서의 얼굴을 보고 질문을 거뒀다. 그는 윤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았고, 단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윤서의 학점은 언제나 상위권이었으며, 과제를 제출하는 얼굴은 언제나 상기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교수는 그런 윤서에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말들을 알고 있었다.


"잘하니까, 잘할 거야. 다음 주 중간평가 때 기대하고 있을게."

윤서는 작업실을 빠져나가 사라지는 교수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캔버스를 마주한 윤서는, 자신도 미처 몰랐던 광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은과 신애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었다. 둘은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었다. 신애는 매일 도서관에 갔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복습을 위해, 강의가 없는 날이면 예습을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지은은 달랐다. 그녀가 도서관을 찾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신애는 지금 자신 앞에 앉아있는 지은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애는 책과 지은을 번갈아보며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책장을 넘기는 걸 보니 책을 펴두고 사색에 빠지는 건 아닌 거 같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걸 보니 정말 공부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왜? 뭐?"

신애의 시선이 느껴진 지은이 책을 덮으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아, 아니야. 하던 거 마저 해."

신애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다 했어. 그리고 네가 자꾸 쳐다보니까 부담스러워서 못하겠어."

지은은 책을 가방 속에 넣으며 말했다.


"아, 미안."

신애는 민망한 듯 말을 이어갔다.

"네가 웬일로 도서관에 왔나 해서. 개강하자마자 과제가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은은 책을 다 넣은 가방을 여미며 말했다. 다소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컸다.

"…이제 3학년이잖아. 열심히 해야지!"


지은의 목소리가 조용한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신애와 지은은 자신들을 향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애는 목소리를 낮추며 지은에게 말했다.


"알았어, 조용히 좀 말해."

"아, 미안!"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또 큰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신애에게 속삭였다.

"미안."


신애와 지은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학습 진도를 다 빼지 못한 신애는 집에 돌아가 나머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은과 계속 도서관에 있다간 전교생의 눈치를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신애와 지은은 도서관 입구를 나와 왼쪽에 마련된 자전거 보관대로 향했다. 신애는 그곳에서 자신의 자전거를 꺼냈다.


"나 태워줄 수 있어?"

자전거 안장을 탈탈 털고 있는 신애에게 지은이 물었다.


"안되는데. 이거 뒷 좌석이 없어."

신애가 난감한 듯 말했다. 신애의 자전거는 사이클리스트들이 타는 경주용 자전거였다. 신애는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그리고 하루종일 목적지도 없이 자전거를 주행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걸 즐겼다. 그녀의 배에 새겨진 선명한 복근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애는 능숙하게 한쪽발로 페달을 밟고 반대쪽 다리를 들어 올려 안장에 앉았다. 그녀는 페달을 천천히 굴리며 지은에게 말했다.


"먼저 갈게. 자전거를 학교에 두고 가면 좀 불안해서."

"알겠어. 이따 집에서 보자."

지은은 약간은 시무룩한 얼굴로 신애를 배웅했다. 신애는 순식간에 지은에게서 멀어져 갔다. 검정 옷에 검은색 자전거를 탄 그녀의 모습은 마치 총알 같았다. 지은은 점이 되어가는 신애를 멀리 응시하며 길을 나섰다.


"지은아!"

지은의 뒷모습을 알아본 윤서의 목소리였다. 지은은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윤서야, 이제 집에 가?"

"응. 마침 잘 만났다. 같이 가자."

윤서는 웃으며 지은의 옆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은도 윤서의 걸음에 맞춰 잠깐 멈춰 섰다.


지은과 윤서는 나란히 걸었다. 서로 말이 없었지만 편안함을 알 수 있었다. 함께 걸어가는 시간은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유로웠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색에 빠져 불편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윤서는 교수와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고, 지은은 도서관에서 벌어진 자신의 만행을 돌이켜 보고 있었다.


"어? 저거 신애 아니야?"

셰어하우스에 도착할 때 즈음, 윤서의 시야에 신애가 들어왔다. 윤서는 검은 총알처럼 대문 사이로 쏙 들어가는 신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맞아. 아까 도서관에서 자전거 타고 먼저 갔거든."

지은이 답했다. 지은의 시선은 신애의 자전거 뒷바퀴에 머물렀다. 신애의 자전거에 뒷좌석이 정말로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자전거를 타니까 집에 훨씬 빨리 도착하네."

윤서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는 건강한 신애의 몸이 정말 부러웠다.


"그렇지."

지은의 시선은 계속해서 신애를 쫓았다. 신애는 대문을 통과하고 자전거에서 내린 뒤, 현관 옆 공간에 자전거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지은은 신애의 모습을 보다 문득, 결심한 듯 윤서에게 물었다.

"윤서야,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아니. 왜?"

윤서는 갑자기 멈춰 선 지은을 보며 되물었다.


"그럼, 우리 같이 자전거 배워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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