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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n 17. 2024

3화

이지은은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다. 그녀는 관심받는 걸 좋아했지만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녀는 집안의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한발 늦게 알아채곤 했다. 어젯밤 윤서의 눈물 섞인 외침도 그녀의 방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때 지은은 좋아하는 잡지를 읽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디자인이 독특한 잡지를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지면은 정교한 칼 솜씨로 도려내 따로 보관해 두었다. 그래픽디자인학과다운 취미였다. 지은은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를 발간하리라 다짐하며 학업에 충실했다.


이른 아침 지은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공용 주방으로 갔다. 오늘은 개강일이다. 강의실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렀다. 점심에 먹을 간단한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식빵 두쪽, 참치캔, 마요네즈, 후추, 양상추만 있으면 완성되는 든든한 한 끼였다. 지은은 샌드위치를 도시락 통에 넣고, 캐비닛에서 물병을 꺼냈다. 시간이 남으니 아침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지은은 빵 한쪽을 토스터기에 넣고, 커피포트에 물을 넣어 전원을 켰다. 지은은 물이 끓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든 일과가 순조로운 하루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안녕."

그녀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놀래라. 안녕."

뒤를 돌아보니 효성의 대학동기 동수가 서 있었다. 한동수는 효성과 카풀(car pool)을 하며 등교했다. 그의 차를 얻어 타는 대신, 효성은 동수에게 아침마다 커피를 사주었다. 가끔 짐이 많거나, 지각의 위기에서 그의 호의는 꽤 용이했다.


"뭐 만드는 중이야?" 동수는 지은에게 물었다.

"아, 그냥 도시락." 지은은 차갑게 답했다.


동수는 효성과 함께 등교하는 이유로 셰어하우스를 자주 들락거렸다. 최근 이사를 온 윤서를 제외한 다른 하우스메이트들과는 모두 일면식이 있었지만, 지은은 여전히 그가 불편했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친구라지만 여자들만 사는 집에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는 건 반갑지 않았다. 지은은 아침밥을 준비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불편해진 장소에서 더 이상 평화로운 식사는 없었다. 아무리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그녀라지만 이런 상황은 질색이었다. 그녀는 토스터기에서 나온 빵을 그대로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커피는 물병에 담아 갈 생각이었다.


"오늘 개강이네."

동수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지은에게 또 말을 걸었다.


"응. 그래서 학교 가잖아."

지은은 입 한가득 빵을 물은 채 그의 말에 대충 대꾸했다. 그를 신경 쓰다 보니 자꾸만 빠뜨리는 게 생겼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싱크대 위 물병을 집어 커피를 부었다. 병뚜껑을 한 손에 쥐고 지은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며 동수에게 말했다.


"먼저 갈... 게."

허겁지겁 먹은 빵에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겨우 동수에게 인사를 건넨 지은은 그를 지나쳐 현관문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에 물병의 커피를 식혀 마실 생각이었다.


"어? 어..."

동수는 당황한 듯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동수는 현관으로 향하는 지은을 피해 벽에 바짝 붙었다. 지은은 누구보다 빠르게 현관을 열고 집을 나섰다. 동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세요?"

이때, 방에서 나온 윤서가 동수를 보며 물었다.

"예?" 동수는 처음 본 얼굴에 놀라 말문이 막혔다.


윤서는 그 길로 동수를 지나 부엌으로 갔다. 그가 누구든 윤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개강'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학업에만 충실하리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어젯밤의 눈물로 퀭해진 두 눈과 푸석한 피부, 대충 빗은 머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윤서의 신경은 전부 작품 작업에 쏠려있었다. 3학년이 된 이상, 이제는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졸업 전 갤러리에 작품을 한 번이라도 전시해 볼 수 있을까, 윤서는  큰 포부를 안고 개강일을 맞이했다.


윤서는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은과 마찬가지로 식빵 두쪽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었다. 냉장고에 있는 햄과 계란도 꺼냈다. 그리고 프라이팬과 오일을 찾아 허리를 숙여 하부장을 뒤적거렸다.


"야, 너 뭐 하냐?"

효성의 목소리에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효성은 동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윤서는 프라이팬을 마저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기름을 두르고 불을 켰다. 타다다닥. 고요한 부엌에 가스불이 소리와 함께 피어올랐다.


"뭐, 뭐가?"

당황한 동수가 말을 더듬거렸다. 동수의 어투를 들은 윤서는 동수가 효성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효성이 그리 호락호락한 여성이 아니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나와. 학교 가자."

효성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은 부엌을 지나 집 밖으로 나왔다. 동수가 차 문을 열자, 효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수석에 앉았다. 동수는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이윽고 윤서도 도시락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시간이 없어 커피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학교 근처 카페에 들를 시간 정도는 있었다. 윤서는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며 걸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엄청난 용기로 각오를 다지는, 그런 의연함이 보였다. 건널목에 선 윤서는 신호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많은 흐린 하늘에 태양이 살짝 빛을 내고 있었다.


"해보지 뭐."

윤서는 외마디 혼잣말을 내뱉고는, 길을 건넜다.




이른 아침, 효성은 하우스메이트들 중 가장 일찍 일어났다. 장거리 연애 중인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다. 효성과 그녀의 남자친구 이재혁은 무려 8년으로 함께해 오고 있다. 둘은 중학생 시절부터 만나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고, 지나온 시간만큼 효성과 재혁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10대를 함께했던 둘은 성인이 된 후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효성은 대학에 진학했고, 재혁은 곧바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멀리 떨어진 서로에게 익숙해진지도 벌써 3년째다. 효성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정확히 오전 7시 30분. 재혁이 출근할 시간이었다. 초보 사장인 재혁은 아직 사업에 대해 배울 것이 남아있다며 항상 일찍 공장에 갔다.

 

"여보세요."

전화기로 피곤함이 느껴지는 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효성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며 말했다.


"응. 자기는?"

"나도 잘...." 효성은 집중력을 발휘해 화장을 마무리 한 뒤, 다시 말을 덧붙였다.

"… 자긴 했는데, 어젯밤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재혁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는 마침 지루한 출근길에 재미난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 새로 온 하우스메이트 있잖아? 윤서라고. 걔 남자친구랑 어제 헤어졌어."

"오, 그래?"


재혁은 윤서에 대해 아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효성에게 자세히 캐묻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상상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왜 헤어진 거지? 아, 그전에 얼마나 만난 거야?"

"헤어진 이유는 나도 잘 몰라."


효성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재혁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두 눈을 크게 뜨며 귀를 쫑긋거리고 있을 재혁이 그저 귀여웠던 것이다.

"걔도 연애를 꽤 오래 했어. 1년 반 정도 만났나? 그런데 요 며칠간 길 잃은 강아지처럼 우울해하더라고. 내가 몇 번이고 방에서 끄집어 내려했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또 방에 처박혀 있곤 했지."


"그랬구나."

재혁은 효성의 설명을 토대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윤서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왜인지 아주 왜소하고 내성적인 아이일 것 같았다. 효성이 말한 길 잃은 강아지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다.


"아무리 연애가 힘들어도 그렇지. 어차피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는데, 계속 울기만 하더라고. 쯧."

효성을 혀를 차며 말했다. 돌이켜봐도 어제는 효성이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힘든 밤으로 마무리되었다.


"에이,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재혁이 흥분하며 덧붙였다.

"우리를 봐. 우리처럼 둘도 없는 사이었을지도 모르잖아."

재혁은 가끔 냉정하다 못해 계산적인 효성의 태도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이토록 차가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 그렇네."

효성은 재혁의 말에 납득하며 머리를 마저 빗었다. 그리고 또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린 특별하지. 우리처럼 만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걸?"

"아, 물론이지."

재혁은 효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답했다. 적절한 때에 그녀가 원하는 답변을 내뱉는 것. 이게 바로 8년간 쌓여온 내공의 결실이었다. 그는 오늘도 완벽한 대처를 했음에 뿌듯했다. 그때,


"어? 잠깐만."

효성의 외마디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수화기 너머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갔음을 짐작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효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차 안은 다시 지루한 출근길로 변했다. 어느덧 그는 공장으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바뀌지 않길 바라면서 그는 효성을 기다렸다. 이윽고,


"미안. 동수가 와서 문 열어주러 다녀왔어." 돌아온 효성이 말했다.

"카풀한다는 동기 동수? 초인종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야?" 재혁이 물었다. 셰어하우스의 초인종 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아, 나한테 문자 했어. 집 앞이라고." 효성이 답했다.

"그랬구나."


"응. 그래서 나 준비하는 동안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

"아, 그랬구나."

효성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재혁은 대답 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재혁의 시선은 신호등을 향해 있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주황으로, 그리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재혁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나 이제 다 왔어. 너도 조심해서 가. 오늘 개강 축하해."

"개강이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오늘도 열심히 일해." 효성이 웃으며 말했다.

"응. 알겠어. 이따 또 연락하자." 재혁의 말에서도 웃음이 느껴졌다.


통화가 끊어지고 효성은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그녀는 아주 잠깐 재혁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마지막엔 서로 웃고 있었다는 점에 효성의 마음이 놓였다. 효성은 재혁이 동수를 경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수를 대학 동기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인의 감정 호소에도 불구하고 동수를 끊어내지 않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효성은 이를 연인 간 신뢰의 문제로 보았다. 재혁은 집까지 찾아오는 동수의 호의가 달갑게만 여겨지지 않다 주장했지만, 효성은 자신에 대한 재혁의 믿음이 강하다면 그런 의심조차 들지 않을 것이라며 반박했다. 한편 민지는 재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효성을 설득시키려 했다.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굳이 하면서까지 관계에 부담을 주는 효성의 입장이 되려 납득이 가지 않았고, 애인에게 수용적인 재혁의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기죽지 않을 효성이었다.


"에잇. 짜증 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효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저런 사색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자신의 모습 또한 싫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선 효성은 동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에서 시선을 옮기니 부엌에 있는 동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효성에 눈엔 동수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수가 부엌을 뒤지는 윤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민지와 같이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동수의 표정만 봐도 효성은 그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효성은 동수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야, 너 뭐 하냐?"


효성은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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