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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by 유수

“잘하긴 뭘 잘해? “ 효성은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 얼굴과 말투로 물었다. 그녀는 윤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윤서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효성은 내심 ‘닭똥 같은 눈물‘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기도 했다. 눈에서 배설물과 같은 게 나온다는 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고 또 비위생적인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상한 비유가 눈앞에서 재연되다니, 효성은 신기함에 윤서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잘했다고 믿고 싶단 말이야.” 윤서가 울먹이며 답했다. 윤서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가득했다. 앞서 소리를 너무 많이 지른 탓이다. “잘했다는 게 뭔데?” 효성이 되물었다. 그녀는 윤서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선택이 정답이었으면 한다는 거야. “ 윤서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답변은 설명보다는 푸념에 더 가까웠다. 마치 그렇지 않은 일이 그저 옳기만을 바라는 헛된 바람을 담은 듯했다. “정답이야. 정답이지.” 민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윤서의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여주었다. 민지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공감이 가지 않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지는 윤서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대학시절 연애가 종료되었다고 대성통곡을 하며 정답을 운운하는 윤서가 한심하다고도 생각했다. 졸업 후에 떠나게 될 동네에서 무엇하러 관계를 맺어가는 건지, 민지에겐 셰어하우스의 효성과의 우정 정도가 가장 적당했다. 그렇다고 그 속내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괜히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효성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입 발린 소리 한번 해주면 덧나나, 민지는 효성이 불필요할 정도로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화룡점정으로 효성의 날카로운 말이 꽂혔다. “정답은 무슨. “ 효성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다시 윤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누가 너보고 문제라도 풀으래? 그냥 서로 감정이 식어서 헤어진 거잖아. 너도 이제 그만해. “


효성은 마지막 말과 함께 방으로 가버렸다. 벌건 토끼눈을 한 윤서의 양 옆에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민지와 신애가 서 있었다. 신애는 방 밖으로 나온 걸 후회하고 있었다. 엿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는데,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질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신애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았다. 2층 복도를 지나 맨 끝방에는 지은이 있을 것이다. 지은이 여기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신애는 궁금했다. 지은이야말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신비주의였다. 하우스메이트들에게 공개된 그녀의 사정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동생과 아버지와 세 식구를 이루어 살고 있고, 잡지를 좋아하는 정도. 지은은 그렇게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그녀는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듯했지만 언제나 모든 것에 한발 늦었다. 오늘 윤서의 눈물 섞인 외침도 그녀의 방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신애는 아마 지은이 방에서 음악을 크게 들으며 좋아하는 잡지를 읽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 한 가지의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눈이 충혈된 윤서의 얼굴이었다. 신애는 이 얼굴에서 무언가 소리라도 나오길 기다렸다. 민지는 그저 한숨을 푹푹 쉬어댈 뿐이었다. “나 자러 갈게. “ 윤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무 운 탓에 머리에서 식은땀이 났다. 윤서는 민지와 신애를 그대로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방문을 열고 잠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머리가 아픈게 감기에 걸린 듯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녀는 욕조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뜨거운 물이 그녀의 몸을 녹여주었다. 윤서는 눈을 감고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다음날 아침, 효성은 하우스메이트들 중 가장 일찍 일어났다. 장거리 연애 중인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다. 효성과 그녀의 남자친구 재혁은 무려 8년째 된 연인이다. 둘은 중학생 시절 단짝 친구로 시작해 이제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10대를 함께했던 둘은 성인이 된 후 각자의 목표를 위해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다. 효성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재혁은 곧바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장거리에도 익숙해진지도 벌써 3년째다. 두 사람은 완벽한 일상을 계획해 두었다. 오전 6시, 재혁은 집 앞 공원으로 나가 러닝을 했다. 40분 정도 뛰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그 사이 효성은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로 향한다. 샤워를 마친 효성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재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는 시간은 정확히 오전 7시 30분. 재혁이 차에 시동을 거는 때이다. 초보 사장인 재혁은 아직 사업에 대해 배울 것이 남아있다며 항상 일찍 공장에 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효성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며 말했다. "응. 너는?" 재혁이 웃으며 물었다. "나도 잘...." 효성은 집중력을 발휘해 화장을 마무리 한 뒤(아이라이너를 그리고 있었다), 다시 말을 덧붙였다. "… 자긴 했는데, 어젯밤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재혁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는 마침 지루한 출근길에 재미난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그 새로 온 하우스메이트 있잖아? 윤서라고. 걔 남자친구랑 어제 헤어졌어." 효성이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오, 그래?" 재혁은 점점 흥미가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남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일일 드라마를 끊지 못하는 이유가 별거 없다는 걸 재혁은 알고 있었다. "왜 헤어진 거지? 아, 그전에 얼마나 만난 거야?" 그는 윤서에 대해 아는 정보가 많지 않았기에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효성에게 자세히 캐묻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상상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헤어진 이유는 나도 잘 몰라." 효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그렇지만 관심을 보이는 재혁의 모습이 떠올라 말을 이어갔다. 말투 만으로도 두 눈을 크게 뜨며 귀를 기울이고 있을 그의 얼굴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걔도 연애를 꽤 오래 했어. 1년 반 정도 만났나? 그런데 요 며칠간 길 잃은 강아지처럼 우울해하더라고. 내가 몇 번이고 방에서 끄집어 내려했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또 방에 처박혀 있곤 했지." 효성이 말했다.


"오호, 그랬구나." 재혁은 윤서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왜인지 아주 왜소하고 내성적인 아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효성이 말한 길 잃은 강아지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다. 실제로 윤서는 키가 작았고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깊은 눈매는 그녀를 병약하게 보이게했다. 하지만 그 속에도 기죽지 않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겉모습만 보고 그녀에게 섣불리 덤볐다가 엎어치기를 당할 것만 같은, 숨겨진 힘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연애가 힘들어도 그렇지. 어차피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는데, 계속 울기만 하더라고. 쯧." 효성을 혀를 차며 말했다. 돌이켜봐도 어제는 효성이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기도 싫은 밤으로 마무리되었다. "에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녀의 말을 들은 재혁이 흥분하며 말했다. "우리를 봐. 우리처럼 둘도 없는 사이었을지도 모르잖아!" "아, 그렇네." 효성은 재혁의 말에 납득하며 머리를 마저 빗었다. 재혁은 말이 없었다. 가끔 지나치도록 차가운 효성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효성은 재혁에게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린 특별하지. 우리처럼 만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걸?" "아, 물론이지." 재혁은 안도하며 맞장구쳤다. 그때,


"어? 잠깐만." 효성의 외마디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수화기 너머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갔음을 짐작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효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차 안은 다시 지루한 출근길로 변했다. 어느덧 그는 공장으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바뀌지 않길 바라면서 그는 효성을 기다렸다. 이윽고 효성이 다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미안. 동수가 와서 문 열어주러 다녀왔어." "카풀(Car-pool) 한다는 동기 동수? 초인종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야?" 재혁이 물었다. 셰어하우스의 초인종 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아, 나한테 문자 했어. 집 앞이라고." 효성이 답했다. "그랬구나." 재혁은 약간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응. 그래서 나 준비하는 동안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 효성은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이상해질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심각해지기 전에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단지 하우스메이트들을 배려해 동수에게 초인종을 울리는 대신, 문자를 보내라고 했을 뿐이었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음을, 효성은 그 진심이 재혁에게 닿길 바랐다. "아, 그랬구나." 하지만 재혁의 말을 계속 차가워져 갔다. 효성은 괜한 죄책감이 들어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재혁은 대답 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양 쪽의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재혁의 시선은 신호등을 향해 있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주황으로, 그리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나 이제 다 왔어. 너도 조심해서 가. 오늘 개강 축하해." 재혁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하하. 개강이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오늘도 열심히 일해." 효성이 웃으며 말했다. "응. 알겠어. 이따 또 연락하자." 효성은 재혁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답하는 걸 눈치챘다. 통화를 마친 효성은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그녀는 잠깐 재혁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효성은 재혁이 동수를 경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수를 대학 동기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인의 감정 호소에도 불구하고 동수를 끊어내지 않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효성에게 이 사안은 연인 간의 신뢰 문제였다. 재혁이 아무리 집까지 찾아오는 동수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우겨도, 효성은 자신에 대한 재혁의 믿음이 강하다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거라며 반박했다. 한편 민지는 재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효성을 설득시키려 했다.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굳이 하면서까지 관계에 부담을 주는 효성의 입장이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굽힐 효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아주는 고집쟁이였으니까.


"에잇. 짜증 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효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옷매무새가 별로였다. 다이어트를 해야할까,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자신의 모습 또한 싫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선 효성은 동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거실을 통해 주방으로 들어가 보니 동수가 멍하니 서 있었다. 효성에 눈엔 동수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한 곳에 고정된 동수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찬장을 뒤지는 윤서가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효성은 동수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야, 너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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