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침대 위 이불과 베개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파묻힌 윤서는 기지개를 켜며 겨우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분 좋은 잠을 자고 난 뒤, 눈을 뜨고 바깥세상을 보기란 정말이지 어렵고 귀찮은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일기예보가 들어맞은 화창한 날이었다. 푸른 하늘,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까지. 윤서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른 날들과 다르게 더욱 격하게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하아-" 그녀는 가슴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내뱉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렸다.
"하필 날씨는 왜 좋은 걸까. “
"김윤서! 일어났어?" 문 밖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노크도 없이 무작정 이름을 외쳐대는 것을 보니 효성이 틀림없었다. 윤서는 이 순간이 반갑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우렁찬 목소리의 아이만큼은 그녀를 내버려 두길 바랐다.
"어, 일어났어." 윤서는 조금 큰 소리로 답했다. 눈은 그대로 감은 채, 문은 닫힌 채로 말이다. 효성의 말을 무시했다간 나중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그럼 나와! 뭐 해?" 효성이 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윤서는 놀란 나머지 두 눈을 번쩍 떴다. 효성은 170센티에 이르는 키에 길게 찢어진 눈매, 그리고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윤서는 그녀가 아주 조금은 무서웠다. 셰어하우스로 이사를 온 날, 효성이 남긴 인상은 꽤 강렬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윤서는 졸업반을 앞두고 새로운 월세방을 구해야 했다. 같이 살던 과동기의 갑작스러운 자퇴로 룸메이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홀로 월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윤서는 수소문 끝에 동문들이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방 5개, 화장실 1개, 공용 거실과 주방. 때마침 가장 작은 방이 남아있어 월세도 저렴했다. 윤서는 홀린 듯 덜컥 계약을 하고 이삿날을 잡았다. 낯가림이 심하고 대학 내 다른 과 학생들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게다가 5명의 여자들의 화장실 쟁탈전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짐 싸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윤서에게는 10개의 박스들과 노트북만이 남았다. 가지고 있던 짐의 절반 이상을 버린 것에 후회가 남긴 했지만, 소용없었다. 작은 방에는 적은 짐이 어울렸다.
대망의 이삿날, 윤서는 미리 연락한 용달차 기사와 집 앞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짐을 모두 싣고 출발하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윤서는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앞당겨지는 게 걱정되었다. 주말 아침에 늦잠이라도 자고 있을 하우스메이트들을 깨우는 불청객이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차에 탄 그녀는 핸드폰으로 부동산에서 알려준 연락처를 찾았다. 하우스메이트 중 가장 믿음직한 아이라며 중개인이 남겨준 번호였다. 최효성. 윤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10분. 그녀는 중개인이 말한 ‘믿음직함‘이 부지런함일 것이라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들리다가,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혹시 최효성 번호 맞나요?"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효성은 당황스러운 듯 답했다.
"어, 나는 오늘 새로 이사 가는 하우스메이트 김윤서라고 해. 지금 가고 있다고 전화했어!" 윤서는 긴장한 채로 말을 내뱉었다.
"그게 뭐?" 효성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아, 그게….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아서…“ 윤서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아지다 못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알았어. 걱정 마. 내가 골목 앞에 미리 나와있을게." 윤서의 말을 들은 효성은 갑자기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윤서의 마음은 한결 편했다. 그저 빨리 짐을 풀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싶었다. 기사는 조수석에 앉은 윤서를 슬쩍 보더니 창문을 살짝 내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코끝을 스쳤다. 윤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용달차는 커다란 다리 밑을 지나 한적한 동네로 진입했다. 윤서는 그제야 셰어하우스가 학교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이전 집은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다면 셰어하우스는 족히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거리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윤서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그저 앞으로 왕복 1시간의 거리를 걸어야 할 자신의 체력에 대한 걱정을 할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윤서는 차에서 내려 기사와 함께 짐을 빼냈다. 셰어하우스는 바로 골목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기사는 박스들을 집 앞에 차곡차곡 쌓으며 윤서에게 물었다.
“2층이라 짐을 안으로 들이려면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하우스메이트들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윤서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기사를 도와 짐을 마저 옮겼다. 기사는 안심이라는 듯 두 손을 탈탈 털었다. 현관 앞에 10개의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윤서는 눈앞의 셰어하우스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64번지. 2층 구조의 오래된 주택이었다. 앞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었고, 언뜻 보아하니 넓은 뒷마당도 있는 것 같았다. 윤서는 시선을 건물 벽으로 옮기며 창문들을 세어보았다. 자신의 방이 어느 창문에 해당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한참 건물을 관찰하던 윤서는 고개를 돌려 기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세..."
"김윤서!" 그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효성이 나온 것이다. 아, 윤서는 그때서야 자신이 효성에게 미리 전화를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효성의 오른손에는 야구방망이가 들려있었다. 효성은 마치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방망이를 들어 어깨 위에 걸쳤다. 그리곤 행진을 하듯 무릎을 높이 올리며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나중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가 오해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윤서는 단지 짐을 함께 옮겨주기로 한 하우스메이트에게 바뀐 시간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은 효성은 윤서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을 느껴버린 것이다. 통화 내용의 어느 부분에서 윤서의 두려움이 엄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효성은 직감적으로 윤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애써 웃으며 뒤돌아 떠났고, 남은 두 사람은 짐을 들었다.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상한 이삿날로부터 일주일 가량이 지났다. 겨우 짐 정리를 마친 윤서에게는 마지막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할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이었다.
“같이 빵 먹자. 부엌으로 내려와.” 효성은 윤서의 방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윤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어두고 감으로써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침대에서 끌어내다니. 윤서는 효성이 굉장히 교활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대충 눈곱을 떼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공용 거실과 주방이 나오는데, 효성은 거실에 있었다. 하우스메이트인 민지도 함께 있었다.
"왔어?"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효성이 윤서를 보며 말했다.
"윤서야, 식빵 구워놓은 거 있어. 먹을래?" 효성 옆에 앉아있던 민지가 물었다. 황민지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적당한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와 큰 눈, 곱슬머리의 생김새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겼지만 말이다. 윤서가 이사를 온 날, 민지는 뒤늦게 짐을 옮기는 데에 동참했다. 짐을 거의 다 옮긴 효성은 마지막 박스를 내려놓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은 민지의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그녀는 조금 더 일찍 방에서 나와 줄 수는 없었냐며 짜증을 냈지만, 민지는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신애와 지은보단 자신이 낫다는 논리를 펼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후 민지는 화해의 의미로 효성에게 와플을 구워주었다. 두 사람이 부엌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던 윤서는, 둘의 사이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오늘의 전개가 설레기도 했다. 곧 울적해질 하루에 대한 위로를 미리 받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윤서는 식탁에 놓인 빵조각을 집으며 답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세 사람은 나란히 거실의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조용했다. 커피를 호로록 들이켜는 소리와 빵을 바사삭 베어무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아무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민지와 효성 사이에 앉은 윤서는 양쪽을 번갈아 가며 눈치를 보았다. 고소한 버터를 바른 식빵이 퍽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민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 낯을 가리는 편이라 윤서에게 빵을 권한 것도 큰 용기를 낸 일이었다. 효성은 점점 상황이 답답했다. 그녀는 셋 중 가장 활달하고 사교적이었다. 다리를 꼬아보고, 콧등을 긁어보고, 손톱을 만지작 거리다, 결국, 효성이 정적을 깨고 말했다. “오늘 다들 뭐 해?”
“아, 뭐. 아무것도.” 민지가 우물쭈물 답했다. 효성과 단 둘이 있을 때와 다르게 대화가 무척 어려웠다. 윤서가 끼어있는 이 자리가 그녀의 자신감을 꽁꽁 숨겨놓는 듯했다. 사실 효성과 민지 중에서는 민지가 더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효성은 그런 민지의 모습을 갑갑하다는 듯 바라보다 윤서에게 물었다. “너는?”
“아, 나는…” 윤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에겐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만난 지 1주일 밖에 되지 않은 동거인들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윤서는 다시 한번 양쪽을 번갈아가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나 있잖아, " 윤서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를 한 번 더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는 말을 해야 할 사안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마쳤다.
"오늘 이별을 하게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