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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n 03. 2024

1화

오전 11시. 윤서는 기지개를 켜며 겨우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래간만에 일기예보가 들어맞은 화창한 날이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이 유유히 흘러갔다. 잠자코 있으면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윤서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왜인지 움직이기 싫은 날이다.


"하아-" 그녀는 가슴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내뱉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가, 다시 무거워졌다. 그녀는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렸다.


"날씨는 왜 좋은 거야."


"김윤서! 일어났어?"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크도 없이 무작정 이름을 외쳐대는 것을 보니 효성이 틀림없었다. 윤서는 피곤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어, 일어났어."

"그럼 나와! 뭐 해?"


최효성. 그녀는 윤서의 하우스메이트이자 집안의 실세이다. 170센티에 이르는 큰 키와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길게 찢어진 눈매는 상대의 기선을 단숨에 제압하기에 딱이었다.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항상 이 집의 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몇 달 전 이사 온 윤서는 그녀와의 강렬한 첫 만남을 잊을 수 없었다.




때는 무더운 여름, 8월이었다. 윤서는 기말고사가 끝난 틈을 타 셰어하우스로 이사를 했다. 함께 살던 대학동기가 방을 빼는 바람에 월세를 온전히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서는 수소문 끝에 여대생 4명이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의 빈방을 찾아냈고, 저렴한 월세의 유혹에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개강 전에 이사를 마무리해야 했던 탓에 이사 일정은 빠듯했다. 기껏해야 한 동네에서 짐 몇 상자만 옮기는 것뿐인데, 그녀에게 확답을 주는 곳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일정이 모두 찼네요.
저희는 미리 예약을 해주셔야 해요.


"어떡하지...." 윤서는 초조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택배이사?' 짐이 한가득 들어있는 상자는 너무 무거워 접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버스라도 타서 하나씩 옮길까?' 이건 그냥 해본 생각이었다. 그러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삿짐센터입니다."

"아 네, 제가 8월 20일 날 이사를 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마침 그날 오전에 시간이 비는 것 같은데, 9시쯤 괜찮을까요?"

"네! 네! 괜찮아요!"

"그럼 그날 9시까지 댁 앞으로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윤서는 마치 기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벅찼다. 최근 그녀에겐 이런 사소한 행복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윤서는 짧은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이사 잘해. 나중에 이야기하자.


메시지를 읽은 윤서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정리할 짐이 남아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닥이 몸을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정신 차리자." 그녀는 외마디 다짐을 외치고 다시 테이프로 상자를 감쌌다. 당장 3일 뒤에 이사를 해야 한다.


이사 당일. 윤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지막 점검을 했다. '가스는 잠갔고, 소등도 했고, 남겨두고 가는 짐은 없고....' 나름 북적이던 집이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니 아련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2년 간 쌓인 추억은 이곳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윤서는 그간 아무 일 없었던 듯, 새로 시작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이제 곧 졸업반이잖아." 3학년은 정말 다를 것이라 다짐하는 그녀였다.


"이사 센터에서 왔습니다!"

밖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는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다. 기사는 꽤나 큰 덩치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짐은 제가 옮길 테니 차에 타 계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왜소한 윤서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 건지, 기사는 혼자 모든 짐을 차에 실었다. 그는 윤서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앉아 계시라니까요."


윤서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다 결국 조수석 문을 열었다. 상자를 옮기는 기사의 기합소리가 가끔씩 들렸다. 윤서는 그럴 때마다 불안한 듯, 재빠르게 그녀의 눈으로 기사를 좇았다. '상자가 너무 무거운가....' 걱정과 다르게 그녀의 몸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도움이 될까....' 윤서는 사소한 일에도 고민이 깊어지는 답답함에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잔뜩 헤집었다. 순간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똑똑똑.

기사가 윤서 쪽 창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가씨, 짐은 이게 다인가요?"

"네. 출발해 주세요."

"네 그럼 갑니다."


기사는 시동을 걸고 새 집으로 향했다. 5분쯤 달렸을까, 윤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거리가 먼데? 여기가 맞나?' 그녀는 머릿속으로 바삐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부동산 중개인이랑 같이 걸어서 집을 보러 가는 길에 이런 큰 길이 나왔었나? 오르막이었다고? 아니, 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윤서는 서둘러 핸드폰으로 주소를 검색했다. 그 순간, 트럭은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어? 핸드폰 안 했음 하는데." 기사가 입을 열었다.

"네?"

"아, 터널이 길어요. 어둡게 운전할 때 차 안에 불빛이 있으면 내가 운전을 잘 못하거든." 기사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깜깜한 어둠 속, 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왜인지 모를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윤서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지금 뭔가 잘못됐어.'


트럭은 어느새 터널 밖으로 나왔다. 밝아진 차 안에서 윤서는 서둘러 핸드폰에서 새 하우스메이트의 연락처를 찾았다.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언제 기사가 차를 세워 그녀를 기절시킬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최효성.


'찾았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길어지는 신호음에 그녀의 심장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받아... 받아... 제발....'


"여보세요."

"어?! 어... 최효성 번호 맞나요?!"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효성은 당황스러운 듯 답했다.

"어, 어... 나는 오늘 새로 이사 가는 하우스메이트 김윤서라고 해. 지금 가고 있다고 전화했어!" 윤서는 기사의 표정을 살펴가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는 잠자코 운전을 할 뿐이었다.


"그게 뭐?" 효성은 조금은 퉁명스러웠다.

"아, 그게... 네가 나 마중 나온다고 했잖아! 짐 옮겨준다고!" 윤서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효성이 그녀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채길 바라면서.

"내가 언제?"

"무슨 말이야! 우리 어제 통화할 때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나 지금 기사님이랑 단둘이 트럭을 타고 가고 있어."


이때, 전화를 받던 효성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윤서에게 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아주 긴 터널을 지났어." 윤서는 태연한 듯 말했다.


"아, 알았어. 걱정 마. 내가 골목 앞에 미리 나와있을게." 효성은 무언가 알았다는 듯, 윤서를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윤서는 전화가 끊기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 마저 말한다면 기사를 더욱 자극시킬 것 같아 참았다. 이후 그녀는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파란 간판의 편의점이 있고, 작은 공원이 그 왼편에 있고, 아파트 단지가 있고....'


"도착했습니다." 기사가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트렁크의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윤서는 당황한 채 차 안에서 주변을 살폈다. 이제 보니 눈에 익은 곳이 보였다. 트럭은 정확히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걸었던 골목길 앞에 멈춰 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윤서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기사에게로 갔다. 자신의 전화통화로 오해를 한 효성이 나오기 전에 기사를 돌려보내야 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옮길게요."


"무슨 말입니까? 혼자 무슨 수로 이걸 다 옮겨요?" 기사는 당황스러웠다. 한눈에 봐도 왜소한 여대생이 무슨 수로 이 무거운 상자들을 옮긴단 말인지, 그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윤서에게 권했다.

"문 앞까지만 옮겨놓을게요. 이거 무거워서 안될 텐데..."

"같이 사는 친구가 와서 도와주기로 했어요! 걱정 마시고 천천히 돌아가시면..."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두 눈은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효성을 찾았다. 잠깐의 착각으로 이 친절한 기사를 납치범으로 만들다니, 윤서는 마지막으로 기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 돌아가세..."


"김윤서!" 그녀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효성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야구방망이가 들려있었다.




"뭐 하느라 방에만 있냐?" 효성이 방문을 덜컥 열며 말했다. 윤서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효성은 늘 이런 식으로 다른 방에 들이닥치곤 했다. 윤서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청승 떨지 말고 밥이나 먹어." 효성은 단호한 말과 함께 방문을 쾅 닫으며 사라졌다.


윤서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효성의 말에 재깍 반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머리를 빗은 뒤 거울을 보며 용모를 점검했다. 셰어하우스의 단점은 온전히 꾀죄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거다. 적어도 윤서에게는 그랬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하우스메이트들이 신경 쓰였다. 이삿날 그녀의 방문을 마구잡이로 열고는 기웃거리던 아이들의 오지랖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짐을 마음대로 들춰보며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야, 이 책 재밌어?"

"넌 옷이 왜 이렇게 없어?"

"이건 뭐야?"


이번에도 눈곱도 떼지 못한 채 거실로 나갔다간 그들의 질문세례에 시달릴게 분명했다. 윤서는 잠시 고민하다, 잠옷을 벗어던지고 후드티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기 전, 그녀는 숨을 푹 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거실에 도착해서 주고받을 대화까지 예측해 본 뒤에서야 윤서는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왔어?"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효성이 윤서를 보며 말했다.

"윤서야, 식빵 구워놓은 거 있어. 먹을래?" 효성 옆에 앉아있던 민지가 물었다. 황민지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큰 눈, 곱슬머리의 생김새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겼지만 말이다. 윤서는 식탁에 놓인 빵조각을 집으며 답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윤서는 굳이 당장 입을 열지 않았다. 적막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곧 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민지 역시 가만히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윤서는 식사를 마치는 대로 방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또는 절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날이었다. 버터가 발린 부드러운 식빵이 퍽퍽하게 느껴질 만큼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의아하게도,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난 사람은,


"나 있잖아, " 고요함을 깬 윤서의 목소리에 효성과 민지의 시선이 머물렀다. 윤서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별을 하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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