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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n 24. 2024

4화

5명의 여대생이 살고 있는 이 셰어하우스의 입구를 지나면 곧바로 거실이 보인다. 거실 뒤로는 아담한 부엌이 있고, 거실의 바로 옆으로는 집에서 가장 큰 서신애의 방이 자리한다. 현관 옆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면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의 방과 공용 화장실이 있다. 5명의 여자 사람이 한 화장실을 공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전성시인 이 좁디좁은 화장실은 그야말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하우스메이트들은 화장실 사용시간을 두고 자주 다투었지만, 시간이 지나 서로의 생활 습관에 익숙해져 갔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 바로 보이는 건 민지의 방이다. 황민지는 호텔경영학과 전공이다. 건축가인 아버지를 따라 완공된 한 호텔을 보러 갔는데, 되려 호텔업 자체에 반해 키우게 된 꿈이었다. 민지는 언젠가 자신의 호텔을 운영할 것이고, 건축은 꼭 아버지에게 맡기겠노라 다짐했다. 아, 그리고 경험상 화장실은 무조건 크게 짓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민지는 대학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왜인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면 피곤함을 느꼈다. 그녀는 수업이 끝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도서관에 있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에 도착한 민지는 순식간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엎드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최근 읽기 시작한 인테리어 잡지를 펼쳤다. 그녀는 훗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할 그녀만의 호텔 객실 인테리어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너무 먼 미래라며 핀잔을 줄 테지만, 민지는 이게 오히려 과제보다 흥미롭고 건설적이라 생각했다. 사실 과제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민지는 항상 해야 하는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을 우선으로 두었다.


위잉- 위잉-


한참을 인테리어 잡지에 얼굴을 묻고 있던 민지의 옆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몸을 일으켜 발신자를 확인했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뱉은 민지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딸, 잘 지내니?"

수화기 너머 민지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잘 지내죠. 이제 수업 끝나서 집에 왔어요."

"수업이 너무 일찍 끝난 것 아니니? 학점은 잘 관리하고 있는 거야?"

민지의 엄마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네, 그럼요. 다른 날에 강의가 몰려서 오늘이 여유로운 거예요."

민지는 차분히 답했다.


"그래, 수업이 없더라도 공부 게을리하지 말고. 자격증 시험도 찾아보거라."

"네."

"효성이랑은 잘 지내니?"


효성과 민지는 사실 같은 학과에 진학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둘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계기로 친구가 되었고, 함께 집을 알아보다 현 셰어하우스에 오게 되었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민지는 효성과 늘 등하교를 함께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은 효성의 전과로 인해 약간의 거리감이 생겼다. 효성은 식당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 경영학과로 전향했다. 그녀는 요식업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네. 잘 지내요."

"효성이처럼 경영학과로 전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호텔경영은 너무 세부적...."

"제가 알아서 해요."

민지는 엄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쉬어라."


민지는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꿈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민지의 엄마는 민지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그녀의 앞날에 대한 계획에 적극 관여했다. 효성은 부모의 관심을 받는 민지를 부러워했지만 민지는 그런 엄마의 태도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책장을 가득 채운 호텔 경영학 서적, 스크랩북, 호텔 건축 도면 스케치들은 아무리 개수가 늘어나도 그녀의 엄마를 설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민지는 음악을 끄고 보고 있던 인테리어 잡지마저 덮어버렸다. 그리곤 책상에 앉아 과제를 하기 위한 노트북을 켰다.


똑. 똑. 똑.


"집에 있었네?"

효성이 민지의 방문을 열며 말했다.

"응, 들어와."

민지는 의자에 앉은 채 효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침 하기 싫었던 과제를 미룰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등장한 셈이었다.


효성은 민지의 방에 들어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익숙한 듯 민지의 침대에 곧바로 뛰어들었다.


"아, 푹신하니 좋다."

효성은 민지의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너도 하나 사. 이거 비싼 거 아니야."

민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응? 너 뭔 일 있는데?"

민지의 웃음에 수상함을 느낀 효성이 물었다.

"아니, 뭐..."

민지는 말 끝을 흐렸다. 정말이지 효성 앞에서는 거짓말도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인데? 엄마랑 통화했어?"

효성이 물었다.

"어..."

민지의 말에 놀라움이 느껴졌다. 민지는 가끔 효성이 점집을 해도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거 같더라. "

효성이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잊어버려. 그냥 너 걱정돼서 하신 말씀 일건대."


"걱정돼서 한 말을 어떻게 그냥 잊어?"

민지가 되물었다.


민지의 물음에 효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사실 걱정돼서 하는 말은 그 마음만 전달되면 그만이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하셨건, 어머님의 '관심'과 '사랑'만 네 머릿속에 남기라고."


민지는 효성을 한참 바라보았다. 효성은 마치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사는 아이 같았다. 경영학과로 전과를 할 때도 그녀는 확신이 있었다. 2학년 기말고사 이후, 전과를 결심한 효성은 그 길로 신청서를 접수하고 면접 준비에 매진했다. 물론, 민지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통보와 같던 그녀의 결정에 민지는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목표에 확신이 있는 효성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민지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지만, 효성만큼의 자신이 있진 않았다. 한편으로 막막한 장래희망을 효성은 확실한 계획으로 만들었다. 민지의 시선에서 효성은, 어떠한 고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른과도 같았다.


"왜 자꾸 봐?"

효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아니야."

민지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야."


두 사람 사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민지는 무언가 떠오른 듯, 효성에게 말했다.


"아 참, 오늘 아침에 동수 왔었어?"

"아, 응. 내가 문 열어줘서 거실에 있었어."

"애들이 불편해할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집 안에 들어오는 건 좀 그래."


"아니 방을 엿보는 것도 아닌데...!"

효성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짐을 알아채고 말을 아꼈다.

"그래도 여자애들만 사는 곳이잖아. 윤서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놀랐을 것 같은데."

민지가 이어 말했다.


"하, 정말. 그냥 친구 한 명 집에 오는 건데 왜 이렇게 신경 쓸게 많은지...."

효성이 중얼거렸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민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몰라. 그런 일이 있어."

민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뻔하네. 재혁이가 동수 오는 거 알았구나?"

민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니, 뭐..."

효성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민지가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이래 봬도 동거 3년 차 아닌가.


"재혁이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동수보고 집 앞에서 기다리라고 해."

민지의 말투가 마치 잔소리 같았다.


"아잇, 알았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민지는 약간 짜증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수의 출입을 자제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아침을 보냈기 때문이다.  




등굣길. 동수의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효성은 장밖을 보며 날씨를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운전하는 동수의 옆모습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 뭐냐?"

"응? 뭐가?"

동수는 당황한 듯 답했다.


"너 왜 윤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효성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걔 이름이 윤서야?"

동수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어, 방학 때 우리 집에 이사 온 애야."

효성은 말을 이어갔다.

"걔랑 인사도 안 했어?"


"아, 어. 그냥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길래 말은 못 걸었지."

"그런데 그렇게 계속 바라봤다고?"

효성이 다시 물었다.


"그, 그렇게 부답스럽게 봤나?"

동수가 당황한 듯 말했다. 마침 학교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차를 세워두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을 떼지 못했어. 내 이상형이었거든."


"뭐?"

효성은 기가 찬 듯 말했다.

"걘 안돼. 최근에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오히려 잘됐네!"

동수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나 좀 소개해 주면 안 될까?"


"됐어. 넌 어차피 안돼."

효성은 딱 잘라 말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동수는 마음이 상한 듯,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그냥 알아."

효성은 짜증 섞인 말투로 답하며 차 밖으로 나갔다.




민지의 방에서 나온 효성은 자신의 방으로 가 책상 위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현관문에 쏠려있었다. 효성은 초조한 듯 창밖을 수시로 내다보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딸깍. 쿵.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효성은 바짝 긴장한 채  귀를 쫑긋 거렸다.


쿵쿵쿵 쿵쿵.

끼익. 탁.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이어 방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효성은 담담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윤서의 방 앞에 섰다.


똑똑똑.


노크를 한 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는 효성 앞에 윤서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윤서가 차갑게 물었다. 윤서와 효성은 아직 어색함이 남아있는 관계였다.


"음, 학교 잘 다녀왔어?"

효성은 이내 질문을 한 자신을 원망했다.


"갑자기 무슨...."

윤서는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잘 다녀왔어. 너는?"

그녀는 예의상 효성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 잘 갔다 왔지. 아...."

효성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뜸을 들였다.


"왜? 무슨 일인데?"

윤서는 처음 보는 효성의 모습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 우리 과에 한동수라는 애가 있는데, 오늘 아침에 널 봤다고 하더라고."

효성이 결심하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윤서가 물었다.


"걔가 너한테 관심이 좀 있대. 그래서 그런데 한번 만나볼래?"

효성은 말이 끝나자마자 윤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속으로 바랐다.


'관심 없다고 해. 제발'


"아..."

윤서는 외마디를 내뱉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답했다.

"아니 관심 없어. 미안하다고 전해줘."


"오!"

효성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추임새를 무마하기 위해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잘 말할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효성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녀는 펼쳐둔 책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다행이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책 페이지를 훑으며 생각했다.


'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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