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해치운 윤서는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붓칠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완성시킨 캔버스에 물감을 올릴 차례였다. 그녀는 커다란 면적에 맞는 넓은 붓으로 색을 칠했다. 쓱 쓱. 짧은 팔을 크게 움직이며 하얀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내는 데에는 일관된 움직임만 한 게 없었다. 윤서는 점차 꽉 찬 머릿속이 비워짐을 느꼈다. 몸이 가벼워지고 팔과 어깨도 부드럽게 캔버스 위를 휘저었다. 1시간쯤 뒤, 윤서는 숨을 고르며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작업물을 응시했다. 이제 그녀의 앞에는 까맣게 칠해진, 아주 커다란 캔버스가 있었다. 붓칠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빛의 방향에 따라 얼룩덜룩한 무늬가 보였다. 윤서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으면서도,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작품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안녕!” 윤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만큼이나 당황한 동수가 서 있었다. 동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무 반가워서 그만…“ 윤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냐, 괜찮아. 내가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그랬어.” “그랬구나. 무슨 생각했는데?” 동수가 물었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윤서의 작업실이 무척 반가웠다. 내부 공사로 인해 바뀐 강의실이 바로 이 건물에 있을 줄이야. “그냥, 이것저것.” 윤서는 대충 답했다. 사실 생각의 흐름이 이미 깨져버려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이래서 작가들이 예민해지는 건가, 윤서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았다. “아, 그래. 아무튼 반가워. 나는 저번에 셰어하우스에서 본 동수야.” 동수는 해맑게 웃으며 윤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그래. 반가워.” 윤서는 떨떠름하게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20대 초반이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요청하다니. 윤서는 동수가 조금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나 하는 행동을 어린아이가 따라 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뭐야?” 동수가 윤서의 캔버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내 작품이야. 아직 미완성이지만…” 윤서는 수줍게 말했다. “멋지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동수는 또 밝은 얼굴로 묻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윤서는 난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동수에게 설명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같은 과 학생이었다면 모를까, 경영학도가 보는 예술이란 그저 허세 섞인 말들로 잘 꾸며진 상술에 불과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윤서는 우물쭈물 거리며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수는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난 예술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이런 작품을 보면 늘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더라고. 뭐랄까, 한눈에 그 뜻을 알아채기엔 너무 심오하달까?” 동수와 눈이 마주친 윤서는 이제 더 이상 답을 미룰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있을 발표과제를 연습하는 셈 치고 동수에게 설명을 해보기로 했다. “음, 이 작품은 내 어릴 적 경험에 관한 거야.”
“어릴 적 경험!” 동수가 감탄하며 덧붙였다. “어떤 경험이었는데?” 윤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13살 때 겪은 일인데, 어느 날 집에 사촌오빠가 찾아왔었어. 오랜만에 본 오빠가 반가워서 동생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지. 맛있는 저녁까지 먹고. 자기 전 일기장에도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고 적을 정도로 재미있었어. 그런데 그날 밤, 한참 잠에 빠져있었는데 누군가 내 잠옷 단추를 만지작 거리는 거야. 실눈을 떠보니 사촌오빠가 내 방에 들어와 있었어. 오빠는…” 윤서는 말을 멈추고 동수의 얼굴을 봤다. 그의 표정은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올 것을 알고 대비하고 있는, 한 번은 철렁할 가슴을 미리 부여잡고 있는 관객과도 같았다. 윤서는 고개를 돌리며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작품의 제목은 아직 정하지 못했어. ‘트라우마’로 해야 할지, ‘극복’이라 해야 할지 말이야. 사실 내 마음에 달린 거겠지. “ 윤서는 계속해서 동수를 등지고 있었다. 동수는 머릿속이 하얘져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호감 가는 여자에게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더니 심리상담을 요하게 된 꼴이었다. 동수는 대화를 끝내고 작업실을 나갈만한 핑곗거리를 고민했다. 그의 찡그린 미간을 눈치챈 윤서는 가장 적당한 말을 알고 있었다. ”나 아무래도 작업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만 가줄래? “ ”어 그래. 안녕. “ 동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돌아 나갔다. 윤서는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검은 물감에 흰색을 조금 섞었다. 파란 물감도 한 방울 넣었다. 윤서는 물감이 잘 섞이게끔 붓을 팔레트에 비볐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캔버스에 획을 긋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붓칠에 집중했다. 머뭇거림이나 계산은 없었다. 그녀는 두꺼운 스펀지에 물을 적셔 캔버스를 닦기도 했다. 검은 바탕에 밝은 윤곽선이 은은하게 보이도록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또다시 시간이 지나 어느덧 밖은 캄캄해진 밤이었다. 윤서는 이번에도 뱃속 꼬르륵 소리에 맞춰 작업을 중단했다. 그녀는 멀찌감치 서서 캔버스를 감상했다. 얼룩덜룩한 검은 배경 위에 안개처럼 번진 두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서는 그림 속 눈빛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을 나온 동수는 건물을 나서는 효성과 맞닥뜨렸다. “수업 안 들어?” 효성은 다짜고짜 동수에게 물었다. “들어야지. 내가 여기 왜 왔겠냐.” 동수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며 답했다. 효성과 동수는 강의실로 향했다. 효성과 나란히 걷던 중, 동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네 하우스메이트 윤서말이야. 너희랑 잘 지내? “ 효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지내지. 내가 설마 나랑 사이 안 좋다고 너랑 윤서 소개를 안 시켜준 것 같아? “ 동수는 자신을 노려보는 효성의 눈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말했다. ”그런 생각한 거 아니야. 그냥,“ 그는 머뭇거리다 효성의 눈을 보며 말했다. ”걔, 잘 들여다 봐줘.” 효성은 동수의 눈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자신과 동수 사이에 진지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극도로 싫었다. “뭐야, 네가 윤서 보호자라도 되냐?” 효성은 짜증 섞인 말투와 함께 팔꿈치로 동수를 밀어냈다. 효성의 반응에 동수은 다시 한번 자신의 말을 강조했다. ”아니, 걔를 좀 신경 쓰라고!” 효성은 강의실로 들어가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고!” 자리에 앉은 효성은 가방에서 노트와 필기구를 꺼냈다. 그녀는 심란한 듯 펜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이용해 이리저리 돌렸다. 효성은 자꾸만 동수의 말이 거슬렸다. 안 그래도 주말에 함께 자전거 매장에 가자는 윤서의 제안을 거절한 터라, 죄책감 마저 들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굽혀가며 다시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효성은 옆자리에 앉은 동수를 흘겨보았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심란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펜 촉으로 노트를 꾹 눌렀다. 검은색 잉크가 하얀 노트에 서서히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