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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 Jul 08. 2024

6화

"그래도 한 번만 도와줘." 

동수는 책상에 엎드려 효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효성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그녀의 의중을 짐작해 보았다. 


"아, 싫다니까." 

효성이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노트북만을 향했다. 효성은 동수와의 대화를 멈추고 조별과제에 다시 집중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발표자료 준비를 맡게 된 터라 효성의 부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잇, 참." 

동수는 기분 상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러다 이내 다시 효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네 조별과제 도와줄게."


그의 말을 들은 효성은 곧바로 노트북을 덮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동수를 보았다. 그리곤 의심쩍은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물론이지!" 

동수가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그는 활기를 되찾은 듯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동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같이 과제하자. 아, 참고로 난 이번주 주말 한가해."

"알았어."

효성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노트북을 동수 쪽으로 밀었다. 동수는 자연스럽게 효성의 노트북을 열어 그녀의 과제를 살피기 시작했다. 효성은 그런 동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밥 한번 먹는다고 걔랑 너랑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동수는 효성을 슬쩍 보더니, 다시 시선을 그녀의 과제로 옮기며 답했다. 

"아니지. 첫 만남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래도 그게 다른 일들의 계기가 되겠지."


효성은 동수의 답변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그녀 자신이 싫었다. 한낱 철딱서니 같은 그에게는 존경과 같은 감정은 소모하기 싫었던 것이다.


"놀고 있네." 

효성은 동수에게서 노트북을 뺏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빈 강의실을 나가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주 주말에 약속을 잡고 알려줄게. 내일 보자" 


"고마워! 내일 봐." 

동수는 문을 열고 나가는 효성의 뒷모습을 향해 인사했다. 


효성은 강의실 문을 세게 닫고 나왔다. 그녀는 윤서의 거절의사를 듣고도 만남 자리를 주선해 달라는 동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기회를 잡아서 어디에 쓰겠다는 건지, 효성의 눈에 동수는 그저 바보 같았다. 어찌 되었건 그런 바보가 자처해서 과제까지 도와준다니, 효성은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윤서는 동수에게 관심이 없었고, 효성과 동수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었다. 효성은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내일 아침 재혁과 통화에서 들려줄 재미난 이야기들이 늘어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디자인이나 제품이 있나요?" 

매장 직원이 다소 격앙된 어투로 말했다. 그녀의 앞에는 우물쭈물 거리는 3명의 여대생이 서 있었다. 


"아, 네! 저희는 자전거를 사러 왔는데요..." 

윤서가 먼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네 그러시겠죠. 하하하. 여기는 자전거 매장이니까요!" 


직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답을 들은 윤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어서 옆에 있던 지은이 말을 이어갔다. 


"저희 모두 자전거를 처음 타봐요. 그래서 어떤 모델을 사야 할지..." 

"아! 그러면 제일 기본적인 스타일 어떠세요?" 


직원은 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을 진열대로 끌고 갔다. 화려하고 다양한 모양의 자전거들을 지나 가장 무난한 느낌의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민지는 마지막으로 세명을 대표해 직원에게 말했다. 


"혹시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학생이라 가격도 중요하거든요." 

"네, 물론이죠." 


직원은 진열대 맨 왼쪽에 있는 자전거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하이브리드 자전거예요. 제 생각에 가장 무난하게 도시에서 타고 다닐 수 있는 모델일 거예요. 가볍기도 한데 허리를 세워서 타게 돼서 자세도 안정적이죠. 초보자들은 이게 가장 좋을 거예요. 가격도 제일 저렴한 제품이랍니다." 

직원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확한 발음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자전거 전문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자세를 취했다. 


윤서는 직원의 말에 흔들렸다. 매장에 있는 자전거 중 가장 특징이 없는 무채색의 녀석은 가격과 기능 면에서 더할 나위 없었다. 윤서는 조심스레 직원의 옆으로 가 자전거의 안장 위에 손을 올렸다. 직원은 윤서의 관심을 눈치챈 듯, 자전거를 그녀의 방향으로 밀어보였다. 


"안장도 넓고 푹신해서 편할 거예요." 

직원은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윤서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오..." 

윤서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고는 자전거의 핸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핸들의 브레이크를 당겨보고, 기어를 돌려보았다. 사실 윤서는 자전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직원에게 쉬운 상대로 보이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매장에서 가장 저렴한 자전거를 사더라도 윤서는 자신이 현명한 소비를 하는 고객으로 보이길 원했다.


"손님, 참고로 그 자전거는 핸들에 바구니도 달 수 있답니다." 

"전 이걸로 할게요." 


직원이 마지막으로 날린 회심의 말에 윤서는 당장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윤서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은과 민지의 눈치를 보았다.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닐지 고민이 되었지만, 윤서는 남은 두 사람의 시간을 존중해야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다른 자전거도 볼 수 있나요?" 

민지가 직원에게 물었다. 


네 사람은 매장을 가로질러 다른 진열대 앞으로 갔다. 직원은 마찬가지로 제일 왼쪽의 자전거를 꺼내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생활 자전거, 또는 여성용 자전거로 알려진 모델이에요. 유럽풍 영화의 한 장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느낌, 아시죠? 바게트 빵을 바구니에 넣고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느긋하게 페달을 밟으며 도시를 누비는 거요. 여배우가 치맛바람 날리며 타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그런 자전거예요." 

직원은 이번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듯 표정을 다채롭게 바꾸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손끝을 세심하게 써가며 민지와 지은에게 영화의 배경을 어필했다. 


"디자인도 정말 예쁘죠? 가장 인기 있는 건 이 아이보리색 제품이에요." 

직원은 민지와 지은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전 이거요." 

민지가 자전거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사실 직원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선택을 마쳤다. 라탄소재의 귀여운 바구니와 연한 갈색의 안장, 은은하게 노란빛을 띠는 아이보리색의 몸체, 그리고 얇지만 우아한 바퀴까지. 가격은 윤서가 고른 자전거보다 조금 더 비쌌지만, 민지는 직원의 손짓에서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도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군요! 그럼 마지막 한분은 어떤 자전거를 선택하실 건가요?"

직원은 환한 미소와 함께 지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녀는 도무지 지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자신의 설명에 즉각 반응을 보이던 윤서와 민지와는 다르게, 지은은 계속해서 감흥이 없어 보였다. 지은은 직원이 소개해주는 자전거들을 대충 훑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은은 두리번거리며 매장의 진열대를 둘러보다 한 자전거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물었다.


"저, 혹시 저런 거는 얼마인가요?"

지은의 손가락이 향한 건 매장 벽에 걸려있는 로드용 자전거였다. 신애가 평소 타고 다니는 자전거와 같은 종류였다. 직원은 의외라는 듯 지은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 저건 로드용 자전거예요. 타는 자세가 일반 자전거와는 좀 다른데, 괜찮으시겠어요? 대신 빠른 속도를 보장하죠." 

"네, 저는 저걸로 할게요. 대신 조금 저렴한 걸로 추천해 주세요." 

지은은 굳게 다짐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신애와 견주어 자전거를 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람을 가로지르며 도로를 누비고, 좁은 골목길도 쌩쌩 달리며 어디는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다. 그리곤 언젠가 신애를 추월하며 그녀에게 씩 웃으며 말하고 싶었다.


'먼저 갈게!' 




집으로 돌아온 효성은 하우스메이트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방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거실로 향했다. 윤서, 지은, 민지, 그리고 신애는 거실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온 효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윤서였다.


"오늘 조금 늦었네? 저녁 먹었어?" 

"어... 아니 아직." 

효성은 왜인지 윤서의 관심에 당황했다. 그녀는 가방을 벗어 소파에 던져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효성을 따라 나머지 하우스메이트들도 주방에 들어왔다. 


"우리도 저녁 아직이야. 같이 해 먹자!" 

지은이 효성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효성은 지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밝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민지와 윤서 역시 조금은 흥분된 상태인 듯했다. 무엇보다 윤서가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할 리가 없었다. 효성은 마지막으로 신애를 관찰하며 지은에게 물었다. 


"좋아. 근데 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우리 자전거 샀어!" 

이번엔 민지가 효성에게 답했다. 민지는 두 눈을 크게 뜬 것도 모자라 눈썹마저 이마 위로 있는 힘껏 올려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효성은 어리둥절하며 윤서에게 물었다. 


"너도 샀어?" 

"응. 우리 셋이 같이 가서 사 왔어."


효성은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사실 효성의 자전거는 셰어하우스 뒷마당에 신애의 자전거와 함께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민지를 배려해, 효성은 함께 등굣길에 버스를 타거나 동수와 카풀을 해왔다. 그런 그녀에게 일말의 예고도 없이 자전거를 사러 간 민지가 조금은 야속하게 다가왔다. 물론 효성은 민지에게 그녀의 배려를 알리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효성은 입을 삐죽거리며 냉장고를 뒤적였다. 심란함 덕에 마땅한 저녁 메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효성 뒤에 윤서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나 떡볶이 해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먹을래?"

"어? 어... 좋아. 나 고추장이랑 대파 있어."

"잘됐다. 대파만 썰어줘. 내가 나머지 준비할게." 

윤서는 웃으며 양파와 양배추를 냉장고에서 꺼내갔다. 효성도 고추장과 대파를 꺼내 윤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각자 도마에 재료를 올려 칼질을 시작했다. 효성은 양배추를 썰고 있는 윤서를 한참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번 토요일에 뭐 해?"

"별거 없어. 오후에 자전거 타는 거 말고는?" 

윤서는 대답과 동시에 양배추를 그릇에 옮겨 담고 도마 위에 양파를 올렸다. 그녀는 양파를 반으로 자르고, 또 그 반을 반으로 잘랐다. 양파의 매운 향 때문에 눈물이 나기 시작한 윤서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효성은 개의치 않고 윤서에게 또 물었다. 


"그럼 그날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좋아." 


윤서의 답을 들은 효성은 재빨리 그녀에게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양파 냄새가 점점 올라와 윤서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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