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포닥 과정으로 옮긴 영국의 캠브리지는, 유럽이라는 곳을 처음 겪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또 다른 세상으로의 항해였던 것 같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에서 출발하니 뭐 별다를 것 없겠거니...라고 생각하며 도착했는데, 기대치 않았던 독특한 경험들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Hello대신 Hiya!
아이의 어린이 집 첫날 아침, 아이들과 학부모 몇몇이 울타리에 기대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사나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미소로 즐겁게 손을 흔들며 “Hello~ How are you?” 라고 인사를 하였다. 몇몇 학부모가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핸드폰을 본다. 어떤 학부모는 못 들은 척 하고, 또 다른 학부모는 마지못해 ‘Hi~’라고 들릴 듯 말 듯 대꾸해 주고는 다시 안 본 척 고개를 돌린다. <뭐지?>라는 야릇한 느낌이 고개를 들었다.
영국식 인사와 미국식 인사, 그들의 대화법은 영어라는 공통 언어 사이에서 확실히 대비되는 구분과 특징들을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실수였다. 영국 사람들은 미국인들처럼 처음 보는 이들과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기보다는 조금 더 친해진 상태에서 <Hiya!>라는 인사를 가볍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Hello,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만을 배웠던 영어에 <Hiya!>라는 새로운 인사법이 있을 줄이야...
첫인사의 당혹스러움처럼 배워야 할 문화적 차이가 참 많은 나라… 영국!
영국과 미국은 조상만 같았지,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나라였다.
공립과 사립... 재킷으로 나뉘는 신분의 격차
영국에서는 만 4세가 되면 학교 정규 교육과정의 첫 단계인 <Reception: 초등학교 0학년>을 밟게 되는데 이때부터 아이는 정식 교복을 입게 된다. 우리가 살던 학교 기숙사는 당시 캠브리지의 Perse, Leys, St. Mary, King’s college school 등 유수의 사립학교들이 들어서 있던 지역이었고, 어린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각자 학교의 마크가 세겨져 있던 재킷(blazer)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학교마다 특색 있는 교복들의 스타일과 색깔들이 나름 재미있기도 하였다.
당연히 우리 딸도 그런 재킷을 입을 줄 알았다. 그런데 교복을 구입하라는 안내를 받고 학교 홈페이지를 아무리 보아도 재킷이 보이지 않았다. 재킷 대신 카디건, 점퍼가 있었는데 추후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니 영국은 원래 공립학교에서는 재킷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중학교 중에 간혹 재킷을 입는 공립학교가 있다고는 하여도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재킷의 비싼 가격으로 공립학교에 다니는 서민계층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으려는 <선한 의도와 배려>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견고한 신분사회를 유지해 온 영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당연한 <구분의 메커니즘>이 아이들의 교복에도 적용된 것인지(후자가 더 의심스럽긴 함) 판단이 정확히 서지는 않지만, 이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재킷을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외국인 서민의 계급으로 딸아이에게 카디건을 입히고 학교에 보내며 <웬열? 뭐지?>라는 질문을 속으로 해본적이 있다. <재킷과 카디건으로 구분되는> 교복의 공립과 사립의 구분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카디건을 입은 아이의 학급 단체 사진>
교복 얘기를 회상하니, 가끔 남편이 <대박>이라던 캠브리지 대학생들의 기숙사 배정 방법도 문득 떠오른다. 캠브리지 대학에는 31개의 college가 존재하는데, 캠브리지의 학부 대학생들은 각각의 college에 소속이 되어 있다. 그리고 기숙사 방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성적순으로 부여된다. 성적이 좋은 학생은 캠강이 내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얻을 수 있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복도 끝에 박힌 방을 배정받게 된다는 이야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캠브리지의 전망 좋은 기숙사 방은 성적순이다.
< Cambridge Clare College >
친절하지 않은 설명... 학부모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영국의 모든 초등학교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지인들과 함께 겪은 일들 중에는 충분하고 친절하지 못한 학교에 대한 불만이 많이 거론되곤 하였다. 새로 정착하는 이민자 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의 교육활동과 관련된 준비물이나 학사 일정, 학교 행사들과 관련된 안내의 미비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종종 이야기 되곤 하였다.
스스로 알아서 챙겨 주어야 했던 두 가지 종류의 운동화(실내 운동화와 실외 운동화)를 챙겨주지 못해 실내 운동화 하나만을 갖고 생활했던 아이가 비 오는 날 바깥에서 실내 운동화로 뛰다가 진흙이 잔뜩 묻어 일 년 동안 아예 운동화 없이 생활했던 일, 파자마 데이 때 허름한 한국식 내의를 입힌 일이라던가 학교 급식에 아이가 먹기 힘든 음식들이 나올 경우에는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도 된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엄마가 둔하면 고생은 아이 몫이다.
손등이 자주 텄던 아이에게 바세린을 챙겨 준 적이 있었는데, 아이를 데리러 가보니 아이가 바세린을 얼굴에 진흙팩처럼 바른 채 앉아 있었다. 넘쳐나는 바세린 크림 위로 머리카락마저 덕지덕지 붙은게 영 보기가 안 좋았다. 황당해하는 나에게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이 즐거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Isn’t it great? she did it by herself.” 선생님은 바세린의 양을 조절 못한 아이의 서투름 보다는 스스로 무언가를 했다는 Independence를 칭찬했는 데, 솔직히 유쾌하지 않은 <웬열>을 속으로 되뇌었다. 적당히 바르도록 조절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바세린을 반통이나 소비해 끈적끈적한 오일로 뒤범벅이 된 아이 얼굴을 씻어 내느라 꽤나 힘들었다. 만 3세를 갓 넘은 아이에게도도 알려주지 않는데, 다 큰 성인에게 친절함을 기대하지 말라는 조언을 남편이 우스개 소리처럼 하곤 했다. Be Independent!
<생일파티, 참고로 생일파티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예의>
극복하기 힘든 영어의 벽
영국식 영어는 지금도 모르겠다. 발음도 어렵고 단어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스를 보며 주인공의 매력적인 악센트를 사랑하는 영국 소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에게는 도통 먼 나라 이야기일 따름이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영국인들이 영어에 대해 갖는 그들만의 계층의식과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학교 기숙사 뒤편의 공동 정원에서 나이가 매우 지긋하고 우아한 노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고,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영어는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배워서 연음이 많은 미국식 악센트를 쓰게 된 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악센트가 부인에게 혹시 어색하게 들리는지 정중히 물었는데, 그녀의 대답에 한참 말문을 잊지 못하였다.
<나는 네가 말하는 ‘American English’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English의 말 자체가 England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니? American English, Korean English... 전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지. English는 England에서 나오는 거야. 그래서 세상에는 오로지 하나의 English만 존재하는 거고 미국 영어, 한국 영어,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코미디란다. 음... 그리고 사실 너의 영어는 American English라고 할 수도 없어. 보아하니 매우 전형적인 Traditional Asian Accent로 가득 차 있구나. >
무안함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 우아한 영국 노부인의 입가에 모나리자를 닮은 미묘한 승리의 미소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지금도 BBC 방송을 듣거나 영국식 영어를 들을 때마다 가끔 그녀가 영어에 대해 갖는 '자만과 우월의식'이 떠오를 때가 있다. 도통 이해가 불가한 영어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이 막힌다. 그녀는 그렇게 늙어 갈 것 같다.
<런던아이에서 바라본 런던의 모습>
영국의 신분사회를 이해하고, 그 문화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먼 나라에서 온 아시아 가족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민자들은 이방인의 삶을 산다고 하는구나... 태생과 신분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 모습이 다른 우리들은 매번 그 이질감을 이고 하루를 살아낸다.
영국인들처럼 Afrernoon tea를 마시고, 아이들을 영국 학교에 보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질서, 관습들을 따르며 살아가지만 <웬열>의 순간들에 흔들릴 때가 있다. 혼란의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 Who am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