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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Jan 12. 2020

곰팡이는 싫지만 자존심은 지킨다

브렉시트를 바라보는 어느 아줌마의 상념

  영국의 런던 근교에 위치한 윈저 캐슬의 위엄은 복잡한 영국의 역사와 전통을 모르더라도 건물 자체만으로 성을 관람하는 이들의 감탄과 탄성을 자아낸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잠시 접어 두고 캐슬의 아름다움만을 화두로 던져 본다면  성 자체도 아름답지만 섬세히 디자인된 조경의 푸른빛은 오래된 유화적 느낌을 품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유럽의 군주들이 몰락의 길을 걸을 때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연방 왕국의 군주, 윈저 왕가의 공식 거주지 중의 하나인 윈저 성은 한국 가족들이 영국을 방문할 때마다 안내했던 단골 관광 코스였다.

단지 윈저 성만이 아니라 리즈나 에딘버러 성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다. 리즈 성은 한두 시간을 족히 산책해도 남을 만한 아름다운 산책로와 함께 영국 귀족을 닮은 공작새들이 그 화려함을 뽐내며 사뿐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바위산 위에 세워진 군사적 요새였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성 또한 남성적이고 거친 위용을 드러낸다. 어느 캐슬을 가더라도 색다른 감동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리즈캐슬에서>


그러나.....


현지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떠할까? 근래 들어 신축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는 추세이긴 하지만 1950년대 전 후의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영국인들도 상당수다. 우리가 영국에서 처음 얻은 집이 그랬다. 남편의 포닥 신분으로 대학에서 관리하는 아파트를 본 첫날, 관리인 아저씨가 자랑스럽게 보여 준 곳은 거실 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잘 정리된 공동 정원이었다. 


“너무 아름답지 않니? 우리 아파트는 정원사도 있어.”

“오 정말 아름답네요, 혹시 이 창문 뒤의 조그만 터에 저희가 한국 작물을 심어도 되나요?”

아저씨의 눈이 동그래지며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다.

“오.. 그건 말이지. 절대 절대 그렇게 해 선 안 되는 거야. 여기는 정원사가 있는 공동정원이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되니?”

“네, 안 할게요. 미안해요.” 아저씨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하면 안 돼~.”라고 못을 박는다. 


본격적인 집 안내가 시작되었다. 

“ 이 집은 1940년대 지어진 집이야. 벽난로는 막아놔서 안되고, 벽에는 절대 못을 박으면 안 돼. 그리고 방음이 잘 안되니까 밤에는 Tv 틀지 말고.” 

아저씨의 주의 사항에 남편과 나는 째깍째깍 잘 돌아가는 시계처럼 오케이라고 이야기했고, 아저씨는 정원에 깻잎을 심어보려던 나에 대한 경계심을 살짝 놓는 듯했다.


그리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가 곰팡이 이야기였다. 

"너희 집이 1층 <영국에서는 그라운드 플로어라고 함>이라 밑에서 습기가 많이 올라오거든, 아침저녁 문 열어서 환기 자주 해 주고 곰팡이가 생기면 그때그때 빨리 지워야 돼. 엄청 강력한 곰팡이 제거제를 너희에게 소개해 줄게."

1940년대 주택과 공동정원


겨울이 오고 아저씨 말처럼 슬슬 창가 옆으로 곰팡이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나날들이 많아졌다. 화장실 변기 뒤편으로도 곰팡이 포자들이 쑥쑥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이삼일에 한번 세제로 닦아내도 매번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곰팡이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화장실과 창가 옆 곰팡이는 서막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사 온 첫해 겨울, 곰팡이 들과 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곰팡이들은 강력한 세제에도 이미 내성이 생겼는지 하루가 지날수록 그 번식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창가 옆 침대 매트리스와 딸아이의 옷장까지 침범하여 버렸다. 곰팡이가 어린 딸아이의 옷에까지 살살 번져가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곰팡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여기저기서 곰팡이와 관련된 각자만의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침대 프래임 없이 매트리스를 깔았다가 매트리스 밑이 곰팡이 밭이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벽에 핀 곰팡이를 너무 박박 밀면 페인트까지 벗겨져서 키친타월에 세제를 붙여둔 뒤 밀어야 한다는 고급 팁들과 각종 곰팡이 제거제 브랜드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1층 집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말은 정말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비 많고 습기 많은 축축한 영국의 날씨는 곰팡이들이 살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고, 여러 종류의 곰팡이 세제는 우리 집 빨래 세제보다 소비되는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 아이가 기침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 곰팡이 진 옷을 버릴 때마다, 독한 세제 냄새에 숨이 막힐 때마다 <이놈의 영국집>이라는 욕이 나왔다.

영국의 무구한 역사와 고품격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놈의 영국집>과 나와의 인연은 결국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 집을 떠날 때 참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2년을 더 살고, 영국을 떠나 스웨덴에서 집을 구할 때도 <1층 집은 안돼>가 나의 전제 조건이었으니 그 오래된 주택이 내 뇌리 속에 살짝 정신적인 외상을 입혀 놓은 게 아닌지 의심이 된다.


2019년 12월 중순 즘, 영국의 지인으로부터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 선거에 승리했다는 소식과 함께 2020년 1월 말 영국의 EU 탈퇴가 확정되어 보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국인들의 투표 결과가 놀라웠다. 변화보다는 전통을 사랑하며 정원을 관리하고 오래된 가옥 속에서 Afternoon tea를 즐기는 영국인들의 보수성과 극우 세력의 정치적 만남은 브렉시트라는 엄청난 이슈를 대영제국에 몰고 왔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영국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인다. 긴 시간 끌고 온 스코틀랜드의 독립 문제, 아일랜드와 북 아일랜드의 국경문제는 대안점을 도출할 수 있을까? 나폴레옹을 무찌르고 세계를 제패하던 대영제국의 위엄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영국의 성들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이지만 정작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상당 수의 영국인들은 오래된 전통 가옥 속에 스며드는 습기와 추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현실의 단편일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브렉시트를 선택한 그들의 용기를 생각해 본다.

어찌 보면 나 또한 채소 하나 심지 못하는 공동 정원의 비 실용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이놈의 영국집> 거실 창 너머의 정원이 그리운 게 사실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는 곰팡이 때와 사투를 벌이지만, 꽃피는 4월의 정원 사진을 카톡으로 친구에게 전송하는 이중적인 심리...


첫 만남은 수줍고 냉랭했지만 오래 사귄 이에게 깊은 정을 준다는 영국인들의 우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의 가치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그들의 미래가 브렉시트라는 시대적 변화와 선택 앞에서 의미 있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기대한다. 

< 영국을 떠나올 때 깜짝 송별 파티를 열어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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