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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Oct 26. 2020

선택

머무르다

 

2005년 무더운 여름이 피부에 흘러내리던 8월, 갓 결혼한 남편과 나는 인천을 떠나 뉴욕 JFK 공항에서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스테이트 칼리지(State college)로 향하는 작은 경 비행기에 올라탔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과 새로운 곳을 향해 가는 그 시간을 추억하면 도전, 희망, 기대, 성공과 같은 꿈의 언어들이 차 오른다. 두근거림과 함께한 이십 대의 마지막 해! 드디어 미국이라는 대륙에 발을 내딛었다. 

 

셔츠의 단추를 이삼일에 한번씩은 잘 못 끼워 입는 남편이 그나마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게 공부인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장학금이 운좋게 따라다녔고, 어른들로부터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박사과정 1년 차 때에도 그랬다. 과목마다 성적이 좋아 교수들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1년이 흘러갔고 순풍을 만나 예상보다 빨리 도착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의 지도교수가 남편에게 2년 차 박사과정 수업을 더 이상 듣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이수해야 할 학점은 지도교수 본인과의 리서치 미팅이나 세미나로 메울 수 있으니 앞으로는 강의에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연구만 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고용한 지도교수로부터 받게 된 요청에 대해 여기저기 물어보니 박사과정 2년간의 수업은 학생의 배울 권리라 하였고, 지도교수가 세미나나 리서치 미팅으로 수업을 대체 하는 것이 고용조건을 위배하는 불합리한 것이라 하였다. 결국, 남편이 우겨 수업을 신청했고 지도교수가 쪼기 시작했다. 남편은 학생의 강의받는 시간조차 아까워 일을 시키려는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를 받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학교를 옮기기 위해 아홉 개 대학에 다시 박사과정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전부 떨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문제가 되었던 것 같았다. 도전과 희망이 있던 마음 한자리에 불안과 초조라는 가볍지 않은 단어들이 새롭게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그냥 한국 갈까? 넌 직장 복직하고 나도 회사 지원하면...” 

아니! 일 년만 더 도전해 보고 결정하자. 쉽게 온 거 아니잖아.… 아직 굶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의 대화가 오고 갔고, 지금의 나로서는 많이 고민했을 선택을 그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남편의 학과에서 지도교수의  장학금을 대체해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여기에 운좋게 얻은 서로의 과외가 아슬아슬한 통장의 잔고도 채워 주었다.

 

미국 생활 3년 차에 또 지원을 시작했다. 

전해 아홉 개 대학에서 모두 낙방한 남편이 다시 열세 개 대학원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또 불합격 통지서가 하나, 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다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답답한 날이 많았다. 남편은 2년 동안 22개 대학 중 21개의 대학으로부터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런데, 기적처럼 인터뷰 요청이 한 대학에서 들어왔다. 스테이트 칼리지(State college)로부터 자동차로 여덟 시간 걸리는 뉴헤이븐(New haven)에 위치한 예일 대학 (Yale University) 으로부터의 소식이었다. 티제이 맥스 (T.J. Maxx: 브랜드 할인 매장)에서 급하게 쟈켓을 사고, 보슬보슬 눈발이 내리던 날 운전대를 잡았다. 

<길의 끝에 돛단배가 있기를>

남편의 대학원 인터뷰 첫째 날은 본교에서 진행되는 실험실이나 각 학과의 연구와 관련된 대략적인 소개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인터뷰는 둘째 날인데, 한 명의 학생마다 총 8명의 교수님들이 각각 30분씩 4시간에 걸쳐 인터뷰가 진행된다. 남편은 인터뷰를 잘 마칠 수 있었고, 대학에서 주는 5년 fellowship 장학금과 함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5년 후 박사과정을 마치고, 포닥(박사 후 과정)에 지원하던 남편에게 예일대 지도교수가 넌지시 던진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네 포닥 지원 서류에 예전 학교 지도교수님의 추천서는 절대 넣지 말기를!”

결국 추천서가 문제였구나! 남편은 21개 대학 지원을 낙방으로 이끈 고배의 원인을 찾을 수 있어서 시원하다고 하였다. 

 

원하면 뭐든 이룰 것 같았던 혼란스러웠던 갈등의 시간 안에서 우리 부부가 자연스럽게 배운 게 있다면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꿈에는 대가가 따른다>라는 사실이었다. 고민을 해도 포기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불안과 초조우울과 실망집중과 기다림이라는 대가를 치러내야 한다그렇게 적절히 대가를 치렀을 때에야 그 길의 끝에 <또 다른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그런 대가를 치러내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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