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고는 내 인생을 위한 말이라 생각해서 좋아했던 글귀이다. 남들보다 계속해서 늦어지는 내 삶에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남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란 걸 알지만, 주변의 모든 지인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나를 보면 비교를 안 하는 것도 어쩌면 현실부정이라 하겠다.
내 인생에서는 "멈춤"의 시간들이 제법 많았다.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었던 시간도 있었고, 무언가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는 명목하에 있었지만 우울증 등으로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낭비했던 시간이 굉장히 많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이런 남들보다 뒤처진 삶을 나의 "우울과 불안"을 변명으로 삼아왔다. "우울증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단순한 변명이라고 하기엔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통 친구들보다 거의 4~5년 정도가 늦어진 것 같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가 결혼과 출산 등에 관심이 없다 보니, 친구들의 삶의 방향과도 더 많이 달라지기도 한 것 같다.
박사과정도 늦게 시작하여 마치니 거의 서른 중반이었다. 보통 제 때 마치면 서른 즈음이니 20대에 늦어진 4~5년이 계속해서 딜레이를 만들고 있는 거다. 해외로 박사후연구원을 하러 나갈 거라고 하니,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그럼 너 결혼은?" 결혼과 출산은 어릴 적부터 내 꿈에 없었다. 결혼은 한다면 하는 거지만, 출산은 전혀 생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내 삶이 늦어진 게 크게 문제 될 점은 없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프랑스에 와서 보니, 박사과정 자체가 3년으로 한국보다 훨씬 짧은 이곳의 사람들을 보니, 새삼 나가 정말 많이 늦어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으면 어떠냐란 생각도 있지만, 한편으로 내가 과연 경쟁력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해서 위축되기도 했다. 20대 때는 지금 보다 더 많이 불안했고, 더 많이 우울해했다. 박사과정 기간 동안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간을 견뎌내면서 내 자신이 조금은 성장하고 극복해 내가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도 지내면서 종종 우울함에 방에 처박혀 지내는 순간도 있었지만 전보다 회복이 빨랐다. 스스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러다 이 정도는 우울증이 아닌 그냥 우울감으로 보통의 사람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정신과진료를 받으러 찾아갔다. 잘 지냈냐는 말에, 그럭저럭 별문제 없이 지냈다고 했다. 주치의는 말했다. 크게 정신의학적 질병은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현재 복욕중인 약은 아직 복용해야 하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어려움이기에 한국에 돌아가기만 해도 정신적으로 느끼는 많은 부담이 덜할 거라고 했다. 아마 약도 많이 줄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 내가 이제 많이 나아졌구나 하는 생각으로 내 자신이 기특한 것도 잠시, 갑자기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남들보다 뒤처지고, 실패하고 모든 것을 우울과 불안이라는 질환을 변명거리로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온전히 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변명으로 삼을 거리가 없어지는 거다.
이미 주변 친구들과의 삶의 속도자체가 다르다. 이미 벌어진 차이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것 같다. 앞으로는 더 이상의 차이가 생기지 않도록 이 "보통"의 속도를 쭉 이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더 이상 멈출 수 없음을 안다. 또 다른 멈춤이 생기면 이제는 사회로 복귀하기가 어려울 것을 안다. 20대의 실패와 30대의 실패, 40대의 실패는 다르지 않겠는가. 젊은 날의 실패는 만회할 많은 기회가 있으니 모두 경험이라 할 수 있지만, 점점 그런 만회의 기회는 적어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 조금 두렵다.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면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이 날들이 무섭다. 멈출 수 없고, 쉴 수 없이 계속해나가야 하는 이 삶이 조금 버거운 것 같다. 나는 잘해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