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아니고 게으름인 것 같지만, 약을 먹지 않은 이후 일상이 조금씩 무너져가는 느낌이다. 3월 말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 프랑스에서 2년여간 진료를 받았던 내 정신과 주치의는 말했다. 정신과 질병적으로 문제 될 것은 이제 없어 보인다고. 약을 먹고 있었던 것은 조금 더 유지차원에서 먹는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고, 프랑스로 가기 전 다니던 병원을 다시 찾았다. 거기서도 두어 달 꾸준히 약을 받아 복용했다. 병원에 가면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한 마디 의사가 묻는다. 그러면 “괜찮았어요”나 혹은 “조금 우울해졌던 것 같아요”를 시작으로 간단하게 내 상태에 대해 말하곤 했다. 모든 곳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갔던 5곳 가까이 되는 한국의 정신과에서는 대부분이 약물치료 위주의 곳이었다. 상담 같은 것은 별로 없다. 그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한 환자에게 30분 정도의 시간은 거뜬히 써주었기에 더 많은 말들을 의사와 나누곤 했다. 문득 프랑스 생활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건강에 문제가 조금 있어, 두어 달쯤 동네 의원에서 조금 더 큰 병원에 가라 하여 세브란스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예상보다 많은 돈을 내고 각종 검사를 받았고, 내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신약 임상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내가 복용 중인 정신과약이 문제가 됐다. 담당 연구간호사는 3개월은 약을 끊어야 임상에 참여가 가능하다 했고, 의사는 가능하다면 약을 조금씩 줄여서 끊은 후에 임상에 참여하면 어떻냐 제안했다. 임상에 참여할지 안 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워낙 오랫동안 복용했던 정신과 약을 끊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만 6세의 나이에 정신과에서 처음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 후로도 복용과 중단을 반복해 와서, 먹어온 날이 그렇지 않았던 날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 의사가 질병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 했었고, 복용 중이던 약도 모두 저용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의사에게 가서 조언을 받으며 약을 조절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예정된 정신과 진료에 가지 않고 더 이상 남지 않은 약이 없으니 그렇게 약을 중단했다.
약을 중단하고 한 달쯤 된 것 같다. 그동안 한 달은, 그냥 시간이 흘러간 것 같다. 내 삶에서 “열심히”가 사라진 것 같다. 애쓰는 것이 벅찼다고 할까?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다음날 아침 다시 일어나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눕기를 반복한다. 중간에 뭐라도 할 겸,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고 언어 스터디를 가기도 했다. 하지만, 뭐랄까 머리가 계속 멍했다. 이런 멍한 상태이니 일에서도 충분히 집중하지 못한다. 우울증의 한 증상에는 집중력 저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닐 거라 믿고 싶은 마음에 ‘나는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없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한 달이 되어가니,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다. 아무래도 약을 다시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통도 잦아졌다. 제대로 집중하는 것이 없다.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끌어모아 무언가를 하더라도 금세 지쳐버리고 만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주말 내내 집 밖으로 한 발자국조차 나가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도 잘 챙기던 것도 조금씩 건성이 되어버리고 있다.
삶의 모든 시그널이 내가 지금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다. 무언가 큰 실수를 하기 전에, 다시 병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