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에게 잔혹하다. 그렇게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마음의 평안과 약간의 여유, 단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 가지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시간, 돈, 노력, 그리고 감정.
감정. 내가 가장 가난한 화폐. 세상은 끊임없이 그것을 요구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가진 감정의 환율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마치 경제 위기를 겪는 나라의 화폐처럼, 나의 감정은 아무리 써도 큰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도, 관계를 이어가는 데도, 그 화폐는 끝없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럴 만큼의 재산이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리석게도 부족한 걸 감추려고 더 많이 주는 쪽을 택했다. 가진 게 많지도 않으면서, 계산은커녕 손익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퍼주기만 했다. 누군가가 마음의 빈자리를 내보이면, 그걸 채워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 대가로 내 감정은 조금씩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삶은 오래갈 리 없었다. 감정이라는 화폐를 그렇게 무작정 쓰다 보니,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마치 작은 저금통을 깨서 쓰듯 쓸 수 있는 모든 걸 썼다. 어느 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가 내가 감정을 아껴야 한다는 걸 처음으로 배운 순간이었다.
나이가 들고, 주어진 것들이 점점 희미해져 갈 때쯤에서야, 나는 조금씩 아끼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관계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무조건 베풀지 않는다. 가끔은 사람들을 마주할 기회조차 스스로 줄였다. 내가 가진 걸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감정을 아껴 쓰는 삶이 꼭 쉬운 건 아니었다.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거나, 누군가를 이해하는 순간마다 나 자신이 이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가진 건 너무 작고, 세상이 요구하는 건 너무 크다. 결국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해 선택한 건,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아는 척을 하고, 모르는 걸 알아보는 시늉을 하고, 때로는 내가 아닌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나를 조금씩 다듬어가면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때로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살도록 설계된 곳이 아니기에, 나는 내 화폐가치를 올리려 노력했다. 때로는 진심을 숨기고, 때로는 필요 이상의 공감으로 상대를 맞추며. 이런 과정 속에서 배운 게 많다. 사람은 계산적인 면이 필요하다는 것, 모두에게 같은 마음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조금 더 챙겨야 한다는 것.
내가 배운 것들은 모두 필수적인 기술이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나라는 사람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 같다. 그래서인지 이런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나 자신과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정이라는 화폐를 더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만큼의 여유도, 재능도 없다. 대신 내가 가진 작은 재산을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려 한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사람에게 조금 더,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적당히.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여전히 어렵다. 감정을 화폐처럼 쓰며 살아가는 삶은 나 같은 사람에겐 잔혹하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나는 조금씩 그 규칙을 따라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으며, 오늘도 나는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