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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추남 Jun 17. 2024

나는 F형 회사원입니다 (31)

어려운 게 아니라 소중해서 지키고 싶은 거야

.

아침 먹고 산책 뒤 잠시 쉬는 시간.

엄마는 아빠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기 시작한다.


어제 했던 얘기,

지난주 통화에서 했던 얘기,

서운했던 얘기들을 재방송처럼 계속하여 반복한다.


예전에 엄마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너한테 얘기 안 하면 내가 얘기할 곳이 없다고.

그 얘기가 내 마음에 꽂혀서,

그때부터는 들었던 이야기도 라디오처럼 듣고,

자동 응답기처럼 반응했다.


함께 여행 2박 3일째. 모든 대화의 주제가 다시 아빠 얘기로 돌아갔고, 나는 신경이 한껏 예민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깊은 숨을 계속 쉬다가,

결국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엄마, 아빠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될까? 2박 3일 내내 들으니까 좀 힘들어서…."

거기서 대화가 뚝 멈춰버렸다….


아차…

아빠와 지내는 시간이 많은 엄마는,

남에게 말하지 못해 여기서 풀고 있는 걸 텐데..

나는 그 말을 들어주지도 못하는 딸이 되었구나.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냥 조금만 참을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근데 왜 난 또 이렇게 엄마에게 연민을 느끼고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뚝 끊어진 대화를 뚫고 내가 말했다.

"엄마, 그런 얘기 하나 못 들어줘서 미안해…."

엄마는 다른 모녀 사이처럼 편하게 짜증 내고 그러라고, 이러니까 네가 마음이 아픈 거야. 하면서 안아주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남들처럼 엄마한테 짜증 내고, 사과하고,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 근데 그게 참 힘들다.

내가 본 엄마는

항상 혼자고, 외롭고, 아프고, 우리 걱정에 잠을 못 자고, 이렇게 내가 아픈 것에도 자신을 탓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난 엄마를 존경한다.

개방적인 마인드와 예리한 인사이트를 가지셨고,

힘든 환경도 스스로 극복하셨고,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게 고맙고, 대단하다.


그런데 항상 외롭고 불안해 보인다.

그게 안쓰럽고 짠하다.

그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너무 속상하다.

그래서 엄마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엄마가 어려운 게 아니라.

엄마가 너무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다.

엄마가 부서지지 않도록..




스페인에 있는 허양의 남편에게 제주의 소식이 전해졌다.

남편이 우려한 대로였다.


엄마가 꼭 자기 같아서 안쓰럽다는 허양을 보며

장모님도 허양이 자기 같아 안쓰럽다고 하신다.

두 착한 영혼이 서로를 안쓰러워하다가 편해지질 못한다.

아무리 말로 편히 하자 한들 그게 쉽게 되겠나?


허양에겐 미안하지만 남편은, 이를 통해 모녀의 사이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그리고 허양이 지금 얼마나 아픈지 그럼에도 엄마 앞에서 웃기 위해 노력한 건지를 부모로서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서로 울고 힘들지만 분명 더 나은 가족관계의 길로 가는 첫걸음일 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그간 그 속에서 허양은 얼마나 힘들어했나.

남편 없이는 본인가족모임이 편하지 않고

남편이 시댁을 편하게 만나고 웃는 모습을 부러워하고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여행 갔다가 오는 길에 슬퍼서 울면서 운전해 돌아오고, 온갖 불평과 기대를 듣느라 자신의 이야기는 꺼내보지 못하고.

7화에 쓴 것처럼 어린 시절 칭찬 한 번 듣지 못하고.


지금 우울, 공황장애로 병가를 지내고 퇴사를 하려는 시기, 허양 스스로도 달라지려 노력하는 시기에

그녀와 부모의 관계만 여태껏 그대로이지 않았나.

무슨 방향으로든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라고 남편은 생각했기에, 즐거움을 기대하고 간 여행에 모자라고 한동안 우울하고 외로웠더라도 이 또한 허양이 거치고 나아갈 것이었다고 남편은 생각해 본다.


다만 허양이 혼자 힘들고 외로울 때

너무 먼 곳에 있어 전화도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남편은 계속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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