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an 05. 2021

쉽게 오지 않는 방학2

폐기를 여름에 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여차저차 장서점검을 끝내고 폐기할 책을 따로 뺐다. 폐기 규정에 맞게 7%를 골라내자 정확히 1,900권이 되었다. 도서관 한 쪽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걸 셋이서 옮긴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일단 시스템 상에서 폐기 처리를 완료했다. 그리고 근로와 함께 책을 편하게 옮기기 위한 노끈 작업을 시작했다. 폐기 도서를 폐휴지 차까지 옮기는 것은 담당 선생님이 인력을 데려와서 도움을 주시겠다고 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걱정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폐기를 정말 원했고 기다렸음에도 걱정이었던 이유는 바로 위치 때문이었다. 도서관은 별관 2층에 있었는데 그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게다가 폐휴지 차가 서는 구령대까지도 거리가 꽤 되었다.


다시 말해 2층에서 도서묶음을 들고 계단을 내려간 후, 운동장의 절반을 가로질러 가야했다. 그걸 대체 몇 번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직 담당 선생님께서 어떤 인력을 데려오는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냥 동료 교사들이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어느덧 폐기 당일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했다. 근로들도 조금 일찍 출근했다. 폐휴지 차가 일찍 와있었기 때문에 거의 출근하자마자 폐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께서 데려온 인력은 꼬꼬마 3학년들이었다. 애들이 많긴 했지만 노끈 한 묶음도 들기가 버거워보였다. 일단 노끈이 부족해 묶지 않은 책들을 조금씩 쥐어줬다. 내가 다 불안불안했다.


그래서 결국 택한 방법은 그냥 최대한 내가 많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때는 고본 처리를 하는 1학기 말, 7월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 날씨였다. 그날 난 책을 두 묶음씩 들고 족히 20번을 넘게 도서관과 구령대를 오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근로들도 덩달아 열심히 했던 점이다.


구령대에는 관리자들이 있었지만 점점 표정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폐기를 제때 안 해서 7%를 꽉 채우게 만든 전임 사서를 속으로 끊임없이 욕했다. 폐기 책을 안고서는 2학기 책을 살 수 없을 정도라 여름에 하게 만든 것도 그 사람이었으니까. 관리자가 보다 못해 고학년들을 도서관으로 보냈다. 거의 끝날 시점이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한 시간을 불태워 폐기 작업이 끝났다. 땀에 젖은 나와 근로들은 서로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생했어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큰 일을 넘겼다는 안도감과 지친 감정이 뒤섞였다. 담당 선생님에게도 고생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반장을 통해 아이스크림을 보내주셨다.


"선생님이 이거 갖다드리래요!"

"그래 고마워. 친구야 안 힘들어?"

"네! 끄떡 없어요!"


내가 초등학생들의 체력을 얕본 모양이었다. 실제로 다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나보다 더 쌩쌩해보였다. 다친 학생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그렇게 금방 끝내진 못했을 것이다.


묵혀둔 숙원사업을 끝내고 나니, 드디어 방학이 코 앞이었다.




이전 16화 쉽게 오지 않는 방학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