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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Aug 23. 2024

허송세월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예전에 김훈작가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었다. 많은 정보가 들어있고 재미도 있었다. 그 예전에는 소설 『칼의 노래』도 읽었다. 없었던 애국심이 불끈 솟았었다.

이번 연재는 김훈 선생님 작품으로 이어가려고 한다. 최근에 읽은『허송세월』은 핫 베스트셀러다.

내가 산 책이 9쇄다.

허송세월이 좋은가 나쁜가 굳이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편을 나누라고 한다면 나쁘지 않다에 한표를 던진다. 젊을 때는 바쁜 중에 잠깐 여유를 부려보는 것으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나이 들어서는 허송세월하면서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강추한다.


16쪽

몇 해 전,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케를 마셨다.

눈이 키보다 높이 쌓였고 산간 마을들은 눈 밑으로 굴을 뚫어서 왕래하고 있었다. 눈굴 속에서 화살표 안내판을 다라 갔더니 작은 술집이 있었다. 입구까지 눈이 쌓여서 겨우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기서 사케를 마셨다. 주모는 허리가 굽은 늙은 여성이었는데, 화장이 너무 짙어서 허무해 보였다. 큰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개도 늙어서 눈 뜨기를 힘들어했다. 뜨거운 사케의 부드러움이 몸의 바닥에서부터 스며들어 오니까 늙은 주모의 빨간 립스틱이 주는 허무감도 견딜 만했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 든 사람의 술이다.


193쪽

가야토기에는 그리스 항아리의 서사구조가 없고 그림이 없다. 그 자리에는 구멍이 뜷려 있다. 구멍 안쪽은 멀어 보인다. 거기는 대낮도 아니고 밤중도 아닌 어스름이다. 그 시간의 질감은 초저녁이나 새벽과 같아서 밀도가 낮고 헐겁다.

 이 구멍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가야의 옹기장이들을 말하지 않고 쓰지도 않고 죽었지만, 나는 이 구멍의 안쪽에서 새로운 시간의 싹들이 발아돼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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